고령 신씨 시조

| 시대 | 고려 고종 |
| 본관 | 고령 신씨 |
신성용(申成用)은 고령 신씨의 시조입니다. 생몰년은 전하지 않으며, 고려 23대 임금 고종(재위 1213~1259)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냈다고 전합니다. 검교직은 실제 직무를 맡지 않는 명예직 성격의 벼슬입니다.
여러 지역 향토문화대전에 따르면 그의 선대는 대대로 경상도 고령에 살면서 고을 향리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을 지낸 집안이었고, 신성용이 처음으로 과거에 합격해 중앙 관직에 나아갔습니다. 이 때문에 후손들이 고령을 본관으로 삼았습니다. 위키백과는 신성용 자신이 호장을 지낸 것으로 적기도 합니다. 고령이 옛 대가야의 중심지였던 까닭에 고령신씨대종회는 그가 대가야 왕족의 후예일 것으로 추측하며, 일부 자료는 신라 공족(公族)의 후예라고 적습니다. 다만 이를 뒷받침할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전승으로만 전합니다. 같은 신(申)씨라도 평산 신씨와는 계통이 다른 별개의 집안입니다.
후손 가운데 3세에 신인재·신인기 형제가 있었는데, 아우 신인기의 후손은 시중공파를 이루었습니다. 5세손 신덕린(申德隣)은 고려 말 예의판서·보문각 제학을 지낸 명필로,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광주로 내려가 은거했습니다. 그 아들 신포시(申包翅)도 두문동에 은거했다가 세종 때 공조참의를 지냈고, 신포시의 세 아들 신장·신평·신제에게서 암헌공파·정은공파·감찰공파의 3파가 갈라졌습니다.
조선시대 고령 신씨는 상신 3명, 대제학 3명을 비롯해 많은 문신을 배출하였고,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신숙주가 대표 인물입니다. 신숙주는 신성용의 7대손입니다. 오늘날 고령 신씨는 2015년 인구조사 기준 129,718명이며, 본관지 고령군의 운수면 운산리와 우곡면 사촌리 등에는 지금도 후손의 집성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