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 李洁

이발의 아우로 홍문관 응교까지 올랐고 1589년 기축옥사로 숨진 문신, 자는 경연, 호는 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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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1547 ~ 1589
시대조선 중기
본관광산 이씨

생애 약력

이길(李洁)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 자는 경연(景淵), 호는 남계(南溪)입니다. 생년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가 1547년(명종 2), 위키백과의 광산 이씨 항목이 1550년(명종 5)으로 적어 엇갈리며, 1589년(선조 22)에 세상을 떠났다는 점은 같습니다. 증조는 이달선, 할아버지는 이공인, 아버지는 제학 이중호이고, 어머니는 윤구의 딸이며 이발의 아우입니다.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7년(선조 10) 태묘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사인을 거쳐 응교에 이르렀다고 적고, 위키백과는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강원도 순무어사, 의정부 사인, 홍문관 직제학 등을 거쳤다고 서술해 최고 관직 표기가 서로 다릅니다. 이발이 이이·성혼과 멀어져 서인의 미움을 받자, 시사에 참여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이발과 함께 고향으로 물러났다고 합니다.

1589년 정여립의 모역 사건을 계기로 서인이 집권하고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형 이발과 이급은 모진 고문 끝에 장살되었고 이길은 희천으로 귀양 갔다가 다시 불려와 처형되었습니다. 위키백과 이발 항목에 따르면 정철이 이길의 사형을 막으려 임금에게 홀로 보고했으나 형벌을 막지 못했다는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이 있지만, 그 진심에 의문을 제기하는 서술도 함께 소개됩니다.

신원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1694년(숙종 20)이고 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위키백과의 광산 이씨 항목은 1624년 신원되고 1691년에 부제학으로 추증되었다고 적어 연도가 다릅니다. 그의 아들 이원섭은 화를 피해 진도로 들어가 고군면 원포에 터를 잡았고, 후손이 진도 동외파를 이루었다고 전합니다.

과거와 벼슬

1577년 태묘별시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했다는 점은 자료가 같습니다. 위키백과는 부장원(2등)이라 적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을과 급제 후 사인을 거쳐 응교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희천 유배와 최후

이길은 형 이발이 숨진 뒤 희천으로 귀양 갔다가 다시 불려와 처형되었다고 전합니다. 형제 모두 정여립의 모역 사건에 연루된 결과였습니다.

진도로 이어진 후손

이길의 아들 이원섭은 이발의 6촌 이윤의 아들 이근과 함께 목포 달리도를 거쳐 진도군 고군면 원포로 들어왔다고 위키백과가 전합니다. 이들이 진도 동외파의 뿌리이며, 2002년 진도읍 남산리에 광산 이씨 500위를 모신 경모사가 세워졌습니다.

묘소

묘소의 위치는 이번에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후손

아들 이원섭이 진도로 들어가 고군면 원포에 터를 잡았고 후손이 진도 동외파를 이루었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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