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의 영수로 알려진 문신, 자는 경함, 호는 동암(동암·북산), 부제학·대사간을 지냈고 1589년 기축옥사로 숨짐
| 생몰 | 1544 ~ 1589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광산 이씨 |
이발(李潑, 1544~1589)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巖)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호를 동암·북산이라 적습니다. 제학 이중호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윤구의 딸이며, 이달선의 증손입니다. 김근공과 민순의 문하에서 배웠다고 합니다.
1568년(선조 1) 생원이 되고 1573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1574년 사가독서 뒤 이조정랑으로 발탁되었습니다. 이후 1579년 응교, 1581년 전한, 1583년 부제학, 1584년 대사간을 지냈습니다. 조광조의 지치주의를 이념으로 삼아 사론을 이끌었고 경연에서 왕도정치를 주장했다고 합니다. 반면 이조전랑으로서 자기 붕당의 사람을 등용해 원망을 샀다는 평가도 함께 소개됩니다. 동서 분당 뒤 동인의 거두로 서인과 맞섰는데, 정철의 처벌 문제에서 강경파를 이끌어 이이·성혼과 관계가 멀어지고 서인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1589년 동인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 서인이 집권하자, 이발은 관직을 사퇴하고 교외에서 대죄하던 중 체포되어 두 차례 혹독한 고문 끝에 숨졌습니다. 위키백과는 정여립의 집에서 이발의 편지가 가장 많이 나왔고 그 내용이 선조의 일까지 거리낌 없이 논했다는 점이 화를 키웠다고 적습니다. 아우 이길과 형 이급도 목숨을 잃었고, 그 뒤 82세의 어머니와 어린 아들(8세 또는 10세로 자료마다 다릅니다)까지 심문 중에 숨졌으며 끝내 승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처조카 윤선도는 이 일로 서인에 대한 깊은 원한을 품었다고 전합니다.
신원의 시기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위키백과는 광해군 때 여러 차례 신원 요청이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인조 2년(1624)에 이길과 함께 죄가 면해지고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숙종 20년(1694)에 정문(旌門)을 세웠다고 적습니다. 광산 이씨 항목은 1624년 영의정 이원익의 상소로 신원되었다고 하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이길 항목은 이길이 1694년에 신원되어 부제학에 추증되었다고 적습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이번에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선조 11년(1578) 무렵 신하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려 있음이 드러났고, 『선조수정실록』은 서인에서는 정철, 동인에서는 이발이 추대되는 인물이라고 언급한다고 합니다. 이이는 두 편을 화해시키려 했으나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조헌은 이발이 사실을 꾸며 정철을 모함했다고 상소했고, 사간원은 이를 날조라고 반박했습니다.
1589년 음력 10월 정여립이 피신 중 자결하자 이발은 대사간직을 스스로 사퇴하고 교외에서 대죄했습니다. 고문에 승복한 정여립 조카의 자백에 이발이 언급되어 선조가 직접 심문했고, 귀양을 가던 도중 다시 옥에 갇혀 고문을 받다 숨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천여 명의 동인이 죽거나 유배되었다고 하며, 이발과 이길의 재산은 몰수되었습니다. 정철이 이길의 사형을 막으려 했다는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에 대해서는 그 진심을 의심하는 시각도 소개됩니다.
이발 일가의 비극은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을 크게 악화시켜 훗날 동인의 남북 대립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한편 심경(청송 심씨)은 이발 형제가 처형되자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내 주었다가 부령으로 유배되었다고 전합니다. 진도의 광산 이씨는 이 화를 피한 후손들이 들어가 터를 잡은 것이라고 합니다.
묘소의 위치는 이번에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숙종 때 옛 마을에 정문을 세우게 했다고 전합니다.
노모와 어린 아들이 모두 숨졌고, 동생 이길의 아들 이원섭과 6촌 이원준·이근 등이 화를 피해 진도로 들어가 진도 광산 이씨를 이루었다고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