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때 집현전 학사를 지낸 문신, 호는 필문(蓽門), 광주향약을 시행하고 광주를 광주목으로 되돌리는 데 힘썼다고 전하며 묘지가 보물로 지정됨
| 생몰 | 1389 ~ 1453 |
| 시대 | 조선 전기 |
| 본관 | 광산 이씨 |
이선제(李先齊)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 호는 필문(蓽門)입니다. 생년은 위키백과의 광산 이씨 항목이 1389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묘지 항목과 신문 칼럼이 1390년으로 적어 자료마다 다르고, 세상을 떠난 해는 1453년으로 같습니다. 광산 이씨 상서공파에서 이순백을 1세로 세어 5세가 됩니다.
위키백과는 광주 대촌면 이장리에서 태어나 양촌 권근과 매헌 권우에게 글을 배운 뒤 문과에 급제했다고 적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첨지중추원사·호조참판·예문관 제학·형조참의·병조참의 등을 지낸 세종 때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소개합니다. 광산 이씨 쪽 서술은 집현전에서 20년 가까이 세종을 보필하며 훈민정음 창제와 『용비어천가』 주해, 『고려사』 개찬 등 편찬 사업에 참여했다고 전하지만, 이 부분은 이번에 다른 자료로 교차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고향 광주에서는 향약을 시행해 풍속을 바로잡고 후진을 가르친 인물로 존경받는다고 합니다. 서울신문 칼럼은 무진군으로 강등되었던 광주를 광주목으로 되돌렸고 광주향약을 처음 시행한 일로 지역에서 크게 추앙받는다고 적으며, 광주역 동쪽에는 그를 기리는 필문대로가 있다고 소개합니다. 1453년(단종 1) 한양에서 세상을 떠나 이듬해 광주 남촌 만산동에 묻혔다고 전합니다.
그에게는 다섯 아들, 곧 시원(양심당)·찬원(제학공)·조원(청심당)·한원(세심당)·형원(성심당)이 있어 흔히 “오원”으로 불리고, 이들에게서 광산 이씨 상서공파의 여러 지파가 갈라졌습니다. 기축옥사에 연루된 후손들로 인해 한때 직위까지 박탈되었다는 서술이 있으나, 정확한 경위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서울신문 칼럼은 이선제가 강등된 광주를 광주목으로 되돌리고 광주향약을 처음 시행한 공으로 지역에서 크게 존경받는다고 소개합니다. 학술 논문에도 그가 「광주향약조목」을 시행해 향촌 교화에 힘썼다는 서술이 보입니다. 후진에게 글을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광산 이씨 쪽 서술에 기대고 있습니다.
분청사기 상감 '경태5년명' 이선제 묘지는 경태 5년(1454년) 이선제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위패 모양의 묘지입니다. 두 장의 넓은 장방형 판과 두 장의 좁은 판을 붙여 만들었고, 명문에는 생몰년과 행적, 가계를 흰 흙으로 상감했습니다.
1998년 6월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가 2017년 일본인 소장가의 기증으로 돌아왔으며, 2018년 6월 27일 보물 제199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기축옥사로 기록이 제대로 전하지 않던 그의 가계와 이력을 알려 주는 자료로 평가됩니다. 소장처는 국가유산 자료에서는 국립광주박물관이고, 기증 대상이 국립중앙박물관이라고 쓴 신문 칼럼도 있어 자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서울신문 칼럼에 따르면 묘지 명문에 나오는 다섯째 아들 형원은 1479년 조선통신사 정사로 대마도에 갔다가 풍토병으로 순직했다고 합니다. 형원(성심당 이형원)의 후손은 위키백과 광산 이씨 항목에서 죽청파·나주파·진도 동외파 등으로 나뉘는 것으로 정리됩니다. 셋째 이조원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도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1454년 광주 남촌 만산동에 묻혔다고 전합니다. 그의 분청사기 묘지는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다섯 아들 시원·찬원·조원·한원·형원에게서 상서공파의 여러 지파가 갈라졌고, 손자 이달선은 승지에 올랐다고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