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 정사공신으로 영의정에 오른 청백리 (호 조암, 시호 충익)

| 생몰 | 1581 ~ 1660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연안 이씨 |
이시백(李時白, 1581~1660)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 자는 돈시(敦詩), 호는 조암(釣巖), 시호는 충익(忠翼)입니다. 아버지는 인조반정을 이끈 연평부원군 이귀, 어머니는 인동 장씨 장민의 딸이며, 동생은 호조판서를 지낸 이시방입니다. 성혼과 김장생의 문인이며, 위키백과는 부인을 남원 윤씨 윤지숙으로, 아들을 이흔·이한·이열로 적습니다. 생년은 1581년이 통설이나 1592년설도 함께 전합니다.
유생 시절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2등에 올랐고 연양군에 봉해졌습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에는 정충신 등과 함께 안현에서 반란군을 격파했고, 정묘호란 때에는 수원방어사로서 인조를 강화도로 무사히 안내했습니다.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 수어사로 서문을 지켰습니다. 1638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청나라에 볼모를 보내는 일에서 문제가 드러나 여산에 중도부처되었으나 1639년 풀려났습니다. 1644년 심기원의 모반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를 받았지만 왕의 신임으로 추궁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1646년 병조판서, 1649년 호조판서, 1650년 우의정, 1652년 좌의정을 거쳐 1653년 사은사로 북경에 다녀온 뒤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판서를 일곱 번 지냈다고 하며, 소현세자가 죽은 뒤 세자 책봉 문제에서 원손을 세울 것을 주장했으나 이후 효종이 된 봉림대군에게 크게 중용되었다고 합니다. 김육의 건의에 따라 호남에도 대동법을 시행하도록 했고, 효종의 능을 여주 영릉으로 정하는 데도 관여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졸기는 청백함과 충의, 근신한 절의를 당시 어떤 재상도 따르지 못했다고 평했습니다. 현종은 장례 물품을 보냈고 관아와 시전은 3일간 쉬었다고 전합니다.
이시백은 아버지 이귀와 함께 인조반정에 가담해 정사공신 2등에 올랐고, 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 때마다 인조를 지키는 일을 맡았습니다.
판서를 일곱 번 지내고 1653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청빈하여 가난한 선비 집 같았다고 전합니다. 호남 대동법 시행에도 관여했습니다.
묘소는 이번에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아들 이흔(연창군)·이한·이열을 두었고, 장녀는 연안 이씨이며 사위로 풍양 조씨 조내양이 있습니다.
이귀의 아들로 인조반정에 가담해 정사공신이 되었고 영의정에 오른 연안 이씨 문신입니다.
1581년이 통설이나 1592년 출생설도 함께 전합니다.
실록 졸기는 청백함과 충의를 당시 어떤 재상도 따르지 못했다고 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