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가』『어부사시사』를 지은 시조 문학의 대가, 자는 약이, 호는 고산·해옹
| 생몰 | 1587 ~ 1671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해남 윤씨 |
윤선도(1587~1671)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으로 본관은 해남이며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시호는 충헌(忠憲)입니다. 예빈시 부정 윤유심과 순흥 안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인 강원도관찰사 윤유기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입양 시기는 문서마다 1594년 또는 1595년 무렵으로 달리 적혀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윤의중입니다.
161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했으며, 1616년 이이첨 등 대북 세력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경원·기장 등지에 유배되었습니다. 인조반정 이후 풀려나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했습니다. 1628년 별시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뒤에는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고,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소현세자를 보도했습니다. 1634~1638년 성산현감을 지냈으나 병자호란 때 행적이 문제되어 탄핵을 받아 영덕에 유배되었습니다.
1640년대에는 보길도 부용동에 은거하며 세연정·낙서재 등을 짓고 시가를 지었으며, 이때 『어부사시사』를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효종의 부름으로 승지와 예조참의 등을 지내고 시무팔조를 올렸으나 삭탈관직되었고, 송시열과 서원 문제, 효종 산릉 문제, 1차 예송 논쟁에서 맞서다 삼수로 유배되었다가 광양으로 옮겨졌고 1667년에 풀려났습니다. 시조 『오우가』, 『산중신곡』, 『견회요』와 문집 『고산유고』, 의학서 『약화제』가 전합니다. 묘소는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금쇄동 아래 문소동에 있다고 합니다.
병자호란 뒤 보길도 부용동에 은거하며 세연정과 낙서재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 『어부사시사』를 지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위키백과는 이를 1640년대의 일로 서술합니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한 뒤 1차 예송 논쟁에서 3년복을 주장해 송시열과 맞섰고, 그 결과 삼수에 유배되었다가 광양으로 옮겨져 1667년에 풀려났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당쟁의 한 장면으로, 자세한 평가는 학자마다 다릅니다.
증손 윤두서, 손자 윤이후가 가문을 이어 갔고, 해남 연동의 녹우당에 그의 유물이 전합니다. 해남 윤씨 문서도 함께 보세요.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금쇄동 아래 문소동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적장남 윤인미 등 자녀를 두었으며, 증손이 화가 윤두서입니다. 정약용의 외5대조부로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