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언론인·교육자 · 간도 동양학원 사건으로 옥고 · 건국훈장 애국장
| 생몰 | 1900 ~ 1968 |
| 시대 | 일제강점기·광복 이후 |
| 본관 | 온양 방씨 |
방한민(方漢旻, 1900~1968)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며, 광복 뒤에는 교육자로 일했습니다. 본관은 온양이고 호는 아성(牙城)입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1900년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의 온양 방씨 양반 집안에서 아버지 방규석(方圭錫)과 어머니 조현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 방달주(方達周)는 무관으로 용양위 부사과를 지냈고, 아버지 방규석은 1884년 무과에 합격해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한일병합 뒤에도 강경·성동 면장으로 추대되었다고 합니다.
공주농학교를 거쳐 수원의 권업모범장에서 잠업을 공부했습니다. 1920년 『조선일보』가 창간될 무렵 기자로 들어가 편집부·사회부에서 일하며, 로마의 흥망이나 이집트의 현실을 빗대는 방식으로 일제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가 해직되었습니다. 이후 『동아일보』에서도 일했으나 감시가 심해지자 일본 도쿄로 건너가 1922년 유학생들과 함께 『문화신문』을 펴냈고, 니가타현 조선인 노동자 학살 사건 때 유학생 항의 시위를 조직했습니다.
그 뒤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동양학원 설립에 참여해 동포 청년들에게 민족교육을 했습니다. 1923년 일본 영사관 경찰은 이 학원 관계자들이 관공서 파괴와 요인 암살을 꾀했다며 그를 체포했고, 그는 청진지방법원에서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등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공판정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쳐 추가 징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병이 깊어지자 고향 강경 사람들 300여 명이 가출옥 진정운동을 벌였고, 그는 1928년 6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습니다. 1929년 다시 검거되어 1931년 재판을 받았고, 위키백과는 그가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37년 10월에야 출옥했으며 오랜 옥고와 고문으로 몸과 마음을 크게 상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광복 뒤에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전신인 수원농대에서 잠사학을 가르쳤고, 1952년 인하공과대학 설립 때 설립위원으로 참여해 경제학 교수로 일했습니다. 1968년 인천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부는 1990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고, 국가보훈처는 2010년 그를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