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때 일본어 역관으로 중개무역을 통해 '국중 대부호'로 불린 인물 (자 선행)

| 생몰 | 1623 ~ 1709 |
| 시대 | 조선 후기 |
| 본관 | 초계 변씨 |
변승업(卞承業, 1623~1709)은 조선 후기 사역원 소속 일본어(왜학) 역관으로 본관은 초계, 자는 선행(善行)입니다. 조부 변계영, 아버지 변응성 모두 역관으로 알려진 집안 출신이며, 어머니는 예산 정씨입니다. 중국어 역관 장현과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부호 역관으로 꼽힙니다.
1645년(인조 23) 식년시 역과에 2등으로 합격해 왜학 역관이 되었고, 부산 왜관에 자주 파견되어 통역을 맡았습니다. 1664년 왜학훈도, 1671년 절충장군을 거쳐 1681년 문위사 겸 조의사로 대마도에 갔고, 이듬해 1682년에는 쓰나요시 쇼군 습직을 축하하는 통신사 일행에 통역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가선대부로 가자되었습니다.
청나라와 직접 교역할 수 없던 일본의 사정을 이용한 중개무역으로 막대한 재산을 모았고, 장현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 장현 집안과 사돈이 되었습니다. 박지원의 『옥갑야화』에 변승업의 부(富)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널리 알려졌으나, 소설 『허생전』의 '변 부자'가 변승업 본인이 아니라 조부 변계영이나 부친 변응성이라는 견해가 많아 자료에 따라 판단이 갈립니다.
고조부 변옥동은 정난원종공신, 증조부 변희완은 예빈시 참봉을 지냈다고 위키백과가 전합니다. 아버지 변응성은 자식 아홉 중 장남은 무과, 나머지는 잡과에 응시시켜 여섯 아들이 역관이 되었다고 하며, 변승업은 그 막내입니다. 역관은 중인 신분이었지만 외국어 실력과 무역 거래로 큰 재산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1682년 일본 사행에서 돌아온 뒤 가선대부로 가자되었고 곧 무관직 부호군을 받았습니다. 1684년에는 동래부사와 함께 대마도주에게 사사로이 뇌물을 받은 일로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풀려났고, 1686년에는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는 등 정치적 위험도 겪었습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사망 직전 회계장부를 살펴보니 대출금이 은 50만 냥에 이르렀고, 그는 후손들에게 이를 거두려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집안의 화를 막으려 했다고 합니다. 이 수치와 일화는 후대 기록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이므로 사실 여부는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박지원의 작품과의 관계는 앞서 말한 대로 논란이 있습니다.
묘소는 이번 자료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장남 변이창은 역관이었고, 차남 변이흥은 무관이었다고 위키백과가 전합니다. 사후 상속을 둘러싸고 종손자 변정태를 중심으로 친척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숙종 때 일본어 역관으로 중개무역을 통해 큰 부를 쌓은 초계 변씨 인물입니다.
많은 연구자는 변승업이 아니라 조부 변계영이나 아버지 변응성으로 추정하며, 자료에 따라 판단이 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