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무장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한 뒤 조선에 귀화한 영양 천씨 중시조, 호 사암, 시호 충장

| 생몰 | 1543 |
| 시대 | 명·조선 선조 |
| 본관 | 영양 천씨 |
천만리(千萬里, 1543~?)는 명나라 출신의 무장으로 영양 천씨의 중시조입니다. 자는 원지, 호는 사암, 시호는 충장(忠壯, 忠莊으로도 적음)입니다. 문중 자료는 1571년 무과에 장원 급제했다고 전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따라 군량 관리를 맡아 조선에 왔고, 평양 전투와 동래 방면 진격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문중 소개 글은 두 아들 천상·천희와 함께 평양, 곽산, 동래 등지에서 승리했다고 적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에는 마귀 제독을 따라 직산에서 싸웠고, 일본군을 쫓아 울산까지 내려가 싸웠다고 전합니다.
1600년 명나라 사신이 돌아간 뒤에도 조선에 남아 귀화했습니다. 금강산과 지리산을 유람하며 고향을 그리는 시를 지었다고 하며, 위키백과는 이 시를 후손들에게 이민족의 통치 아래 살지 말라는 경계로 풀이합니다. 선조는 자헌대부 봉조하와 화산군의 작호를 내리고 사패지를 주었다고 전합니다. 약 44편의 시와 산문 두 편이 《사암선생문집》에 전한다고 합니다.
천만리는 이여송을 따라 조선에 왔고, 군량 관리와 전투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평양, 곽산, 동래 방면의 승리는 문중 소개 글의 서술로, 구체적인 전투 수치는 위키백과도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전한다'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전란이 끝난 뒤 두 아들과 함께 조선에 정착했습니다. 선조의 은전으로 자헌대부 봉조하와 화산군의 작호, 사패지를 받았다고 하며, 맏아들은 한성부좌윤, 둘째는 평구도찰방이 되었습니다. 금강산과 지리산을 유람하며 시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위키백과는 숙종이 대보단에 모시게 했고, 1827년 순조가 위패를 영구히 모시게 했으며 1910년 순종이 시호를 내렸다고 적습니다. 그러나 이 서술에는 1571년과 1575년의 연도, 시호 표기(忠壯과 忠莊) 등 내부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고, 일부 서술은 출처가 부족합니다. 호암서원과 환봉사에서는 지금도 향사가 이어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전북 남원시 금지면 방촌리에 묘가 있다고 합니다. 경남 고성군 동해면 장좌리의 호암서원에서 음력 8월 1일에 향사를 올리며, 남원 환봉사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두 아들 천상(한성부좌윤)과 천희(평구도찰방)가 각각 좌윤공파와 찰방공파의 파조이며, 후손은 10개 파로 나뉩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로 조선에 와 귀화한 영양 천씨의 중시조입니다.
전북 남원시 금지면 방촌리에 있다고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