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의 오빠로 원나라 요양행성 평장정사를 지냈으나 공민왕에게 처형된 부원 세력
| 생몰 | 1356 |
| 시대 | 고려 후기 |
| 본관 | 행주 기씨 |
기철(奇轍, ?~1356)은 고려 후기의 권세가로 본관은 행주입니다. 몽골식 이름은 바얀부카이며, 누이동생이 원나라 순제의 황후가 된 기황후입니다. 증조부 기홍영은 낭장, 조부 기관은 삼사우사를 지냈고 아버지는 총부산랑 기자오입니다. 기철은 아버지의 차남이며, 장남 기식, 3남 기주, 5남 기륜이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를 '부원세력'으로 분류합니다.
누이가 원의 궁중에서 세력을 얻자 기철도 원나라에서 벼슬을 받고 고려에서는 정승에 임명되어 덕성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1343년에는 충혜왕의 비행을 원나라 중서성에 고발해 폐위를 건의했고, 같은 해 충혜왕을 체포해 원나라로 압송하는 일에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정동행성을 관장했고, 1355년 원은 요양행성 좌승이던 그를 평장정사로 올렸으며 이듬해 '대사도'를 더해 입지를 강화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기황후의 위세를 믿고 토지와 인구를 빼앗는 횡포를 일삼았다는 점, 쌍성총관부의 반민과 역모를 꾸몄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1356년(공민왕 5) 5월 18일 공민왕은 곡연(曲宴)을 열어 기철·권겸·노책과 그 일족을 불러 모은 뒤 도착하는 대로 모두 주살했습니다. 도망친 사람까지 끝까지 찾아 처단하여 죽은 사람이 25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매우 큰 숙청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공민왕의 반원 개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정동행성 이문소를 없애고 쌍성총관부를 되찾았으며 원의 지정 연호 사용을 중단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기황후는 분노해 아들인 황태자에게 복수를 강요했고, 뒷날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내세운 원나라의 고려 침공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설명됩니다. 한편 『고려사』 악지에 실린 「총석정」이 기철의 작품이라는 전승도 있습니다.
공민왕은 5월 18일 잔치를 열어 기철과 권겸·노책을 비롯한 일족을 불러 모아 주살했고, 이 사건이 반원 개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처형된 뒤의 묘소는 전하지 않습니다.
아들로 기식·기주·기륜 등이 전하며 기씨 일족은 이 사건으로 큰 화를 입었습니다.
기철은 기황후의 오빠입니다.
기황후의 위세를 믿고 토지를 빼앗는 횡포를 부렸고 쌍성총관부 반민과 역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1356년 공민왕에게 처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