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의 문인으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교살된 기묘명현, 호 복재, 시호 문민
| 생몰 | 1492 ~ 1521 |
| 시대 | 조선 전기 |
| 본관 | 행주 기씨 |
기준(奇遵, 1492~1521)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행주이며, 자는 자경(子敬), 호는 복재(服齋)·덕양(德陽)입니다. 아버지는 응교를 지낸 기찬(奇禶)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를 조광조의 문인으로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이른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아들 기대항과 증손 기자헌이 관직을 이었고, 전라도로 내려간 형 기진의 아들이 기대승입니다.
사관을 거쳐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었고 박사를 역임한 뒤 사가독서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스승 조광조의 노선을 굳게 지켰으며, 사경으로 있을 때 임금에게 효제(孝悌)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건의했습니다. 1516년에는 저작으로서 천문이습관을 겸했고, 검토관·수찬·검상·장령·시강관 등을 두루 지냈습니다. 이성언이 임금을 속이고 부정을 저질렀다며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고 대각(臺閣)이 이를 묵인했음을 비판해, 훈구파 남곤·심정 등의 미움을 샀다고 합니다.
1519년 응교가 되었을 때 마침 기묘사화가 일어났습니다. 조광조·김식·김정 등과 함께 옥에 갇혔다가 아산으로 정배되었고, 이듬해에는 죄가 더해져 멀리 함경도 온성으로 옮겨졌습니다. 어머니의 상을 당해 고향에 돌아갔다가, 1521년 송사련의 무고로 신사무옥이 일어나자 다시 유배지로 가서 교살되었습니다. 서른 안팎의 나이였고, 사림이 겪은 연속된 탄압의 한가운데에서 목숨을 잃은 셈입니다.
시에도 능해 『해동시선』·『대동운부군옥』에 그의 시가 실려 있으며, 『무인기문』·『덕양일기』를 남겼다고 합니다. 1545년(인종 1)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민(文愍)입니다. 온성의 충곡서원, 아산의 아산서원, 고양의 문봉서원에 제향되었습니다.
1519년 하옥·아산 정배, 이듬해 온성 이배, 1521년 송사련의 무고로 신사무옥이 일어나 교살되었습니다.
고양의 문봉서원, 아산서원, 온성 충곡서원 등에 제향되었으며 묘소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아들 기대항, 증손 기자헌이 관직에 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