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때 영의정에 올랐으나 폐모론에 반대해 유배된 문신, 호 만전
| 생몰 | 1562 ~ 1624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행주 기씨 |
기자헌(奇自獻, 1562~1624)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행주이고 초명은 자정, 자는 사정(士靖), 호는 만전(晩全)입니다. 증조부는 응교 기준, 할아버지는 한성부윤 기대항, 아버지는 기응세이며 어머니는 우찬성 임백령의 딸입니다. 기묘사화에 희생된 증조부 아래 가문이 영의정까지 다시 올라간 흐름을 보여 주는 인물입니다.
1582년 성균관에 입학했고 1590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이듬해 사가독서를 하고 검열이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는 예문관 봉교와 설서를 지냈고, 승지를 거쳐 1597년 호조참판으로 진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습니다. 1599년 강원도 관찰사, 이듬해 부제학과 대사헌이 되었고, 1601년에는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은 최영경의 신원을 주장하며 당시 옥사를 다스린 서인을 탄핵해 실각시켰습니다.
1602년 세자였던 광해군의 우부빈객으로 『맹자』를 강의했고 병조·예조판서와 대사헌을 거쳐 1604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습니다. 선조가 세자를 폐하고 인목왕후의 소생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적극 반대했고,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할 때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던 소북파 유영경 등을 탄핵해 즉위에 공헌했습니다. 1613년 영창대군 피살의 부당함을 주장한 정온이 극형을 받게 되자 강력히 반대해 유배형에 그치게 한 일도 있습니다.
1614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1617년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폐모론이 일자 옳지 못하다고 간언하다 문외출송되어 홍원, 길주 등지로 유배되었습니다. 1620년 덕평부원군에 봉해졌지만 끝내 사직했고, 1623년 인조반정 때 김류·이귀 등이 참여를 요청했으나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반정 후 인조가 불러도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모죄로 압송되었으며,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내응을 우려한 조정이 옥에 갇힌 사람들과 함께 그를 처형하고 일족도 몰살당했습니다. 1627년 이원익·이귀의 상소로 관작이 회복되었습니다.
1617년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주장에 반대하다 홍원과 길주로 유배되었습니다.
1623년 반정 참여를 거절했다가 압송되었고, 1624년 이괄의 난 때 처형되었다가 1627년 복관되었습니다.
처형된 뒤 일족이 몰살당했다고 하며 묘소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일족이 몰살당했다고 전하며, 아들 기준격 역시 이괄의 난 관련 혐의로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1614년(광해군 6)에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1617년 폐모론에 반대하며 간언하다 문외출송되어 홍원에 유배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