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분수의 이(理) 철학을 세운 성리학자, 호 노사, 시호 문간
| 생몰 | 1798 ~ 1879 |
| 시대 | 조선 후기 |
| 본관 | 행주 기씨 |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 본관은 행주이며 전북 순창 출신입니다. 처음 이름은 기금사이고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시호는 문간(文簡)입니다. 아버지는 기재우이고 어머니는 안동 권씨 권덕언의 딸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를 「정자설」「이통설」『노사집』『답문유편』 등 성리학사에서 중요한 저술을 남긴 학자라고 소개합니다.
1815년 양친을 여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전남 장성 하남으로 이사했습니다. 학식이 널리 알려져 1832년 강릉참봉, 1835년 현릉참봉에 임명되었고 1837년에는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사옹원 주부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사양했습니다. 이후에도 전설사 별제, 평안도 도사, 무장현감, 사헌부 장령·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의 학문은 스승에게서 직접 전수받거나 어느 학파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주돈이·장재·정호·정이·주희의 성리학을 스스로 궁리하고 사색하여 완성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를 통해 이황·이이 이후 약 300년간 이어진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논쟁을 넘어서 '이일분수'(理一分殊), 곧 하나의 이치가 여러 모습으로 나뉘어 드러난다는 이론에 바탕한 독창적인 이(理)의 철학 체계를 세웠습니다. 인심도심, 인물성동이, 선악의 문제까지 이 논리로 일관해 설명하려 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 세력의 침략을 염려해 「육조소」라 불리는 첫 번째 「병인소」를 올렸고, 조정에서 높이 평가되어 사헌부 집의, 동부승지, 호조참의 등에 연이어 임명되었으나 사양했습니다. 이 상소는 훗날 위정척사 사상의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고 평가됩니다. 1878년 장성 진원의 월송(지금의 고산리)에 담대헌을 짓고 많은 제자와 함께 지내다 이듬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1927년 건립된 고산서원에 문인들과 함께 봉안되었으며, 손자 기우만이 학문을 이었고 기삼연 등도 문하에서 나왔습니다.
주리·주기의 대립을 넘어 이일분수의 이치로 우주와 인간 심성을 설명하는 독창적인 철학을 세웠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외침에 대한 여섯 가지 방비책을 올린 「육조소」는 위정척사 사상의 이론적 기초로 평가됩니다.
전남 장성 진원면 고산리의 고산서원에 봉안되었으며, 묘갈명은 1906년 정재규가 지었다고 합니다.
손자 기우만이 의병장으로 이름을 남겼고, 문인으로 기삼연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