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의 첨의중찬, 『고금록』 편찬 참여, 시호 문경, 충렬왕 배향공신
| 생몰 | 1233 ~ 1291 |
| 시대 | 고려 후기 |
| 본관 | 양천 허씨 |
허공(1233~1291)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초명은 허의, 자는 온궤, 시호는 문경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본관을 공암(孔巖, 지금의 서울 양천구)으로 적는데, 이는 뒷날 양천으로 바뀐 이름입니다. 아버지는 추밀원부사를 지낸 허수, 어머니는 신정군부인 장씨(합문지후 장극우의 딸)이며, 현종의 왕자 왕충의 6대 외손이라고 소개됩니다. 양천 허씨의 10세로서, 그의 아들 대에 동주사공파·판도좌랑공파·대제학공파의 세 대파가 갈라졌습니다.
1251년 열아홉 살에 성균시에 합격했고, 1258년 최자의 문하에서 병과로 급제했습니다. 유경의 추천으로 최령·원공식과 함께 내시에 보임되어 '정방 3걸'로 불렸다고 합니다. 1267년 호부시랑으로서 신종·희종·강종의 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1269년 권신 임연이 아들과의 혼인을 요구했으나 거절해 미움을 샀습니다. 같은 해 임연이 왕을 폐하고 많은 신하를 죽였을 때는 처상(妻喪)으로 양천에 있어 화를 면했다고 합니다.
1272년 첨서추밀원사에 올랐고, 충렬왕 때인 1279년에는 지첨의부사로서 원나라의 일본 정벌을 위한 전함 건조를 경상도 도지휘사로 맡았습니다. 1281년에는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왔고, 1282년에는 지공거가 되어 이익방 등 33인의 진사를 뽑았습니다. 1284년 수국사가 되어 『고금록』 편찬에 참여했고(양천 허씨 쪽 자료는 '찬술'로 적습니다), 1287년 나얀의 반란 때 왕의 친정을 호종한 뒤 첨의중찬에 임명되었습니다.
1290년 합단이 침입해 왕이 원에 머무는 동안 홍자번과 함께 서울을 지켰고, 조신들이 강화도 피난을 주장할 때 홀로 반대했다고 합니다. 이듬해 원나라 토벌군과 함께 고려군을 이끌고 참전했으며, 1291년 8월 집에서 5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310년(충선왕 2) 충렬왕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문경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셋째 아들 허관은 판도좌랑 등을 지냈으며, 허공의 죽음을 들은 충렬왕이 허관에게 8품 관직을 내렸다고 전합니다.
양천허씨대종회는 허공의 첫째 허정을 동주사공파, 셋째 허관을 판도좌랑공파, 다섯째 허부를 대제학공파의 파조로 정리합니다. 둘째 허숭과 넷째 허총의 후손은 대가 이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양천 허씨 쪽 자료는 본관을 양천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공암으로 적고, 『고금록』도 각각 '찬술'과 '편찬 참여'로 표현합니다. 모두 같은 인물을 가리키는 표기 차이입니다.
보현원 서산 기슭에 묻혔다고 전합니다. 양천허씨대종회 자료는 묘소를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용리(장단군 어룡리로도 표기)라고 적어 표기가 일관되지 않습니다.
양천 허씨 10세로 첨의중찬에 오르고 충렬왕 묘정에 배향된 고려 후기 문신이며, 세 대파의 뿌리가 되는 인물입니다.
1284년 수국사로서 편찬에 참여한 것으로 대백과는 적고, 양천 허씨 쪽 자료는 찬술했다고 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