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즉위를 도운 도승지·숙위대장, 4년간 권세를 잡은 세도정치의 효시
| 생몰 | 1748 ~ 1781 |
| 시대 | 조선 후기 |
| 본관 | 풍산 홍씨 |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은 정조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 자는 덕로(德老)입니다. 위키백과는 아버지 홍낙춘이 홍이상의 8대손이며 정명공주와 홍주원의 6대손이라고 적고, 차남 홍만형이 홍국영의 5대조라고 합니다. 백부는 홍낙순, 누이는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입니다. 1772년 정시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 검열·승문원 부정자를 거쳐 동궁시강원 설서가 되었고, 세손(훗날 정조)의 측근이 되었습니다. 문과 순위는 병과 11위로도, 15명 중 15위로도 적혀 있어 자료가 엇갈립니다.
영조 말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세력과 맞선 홍국영은 정조가 즉위하자 1776년 3월 동부승지에 발탁되고 7월 도승지가 되었으며 이조참판·대사헌·규장각 직제학·금위대장·훈련대장·약원부제조 등을 겸했습니다. 정조는 『명의록』에서 그를 '의리의 주인'이라 부르며 가장 믿는 신하임을 밝혔습니다. 1777년 궁궐에 자객이 든 사건 뒤 숙위소를 만들어 대장이 되었습니다. 정적 홍인한·정후겸 일당의 숙청에도 관여했습니다. 그가 이끈 4년가량(1776~1780)을 흔히 세도정치의 시작으로 부릅니다.
1778년 누이가 원빈이 되었으나 1년이 못 되어 급사했고, 『한중록』은 홍국영이 독살을 의심해 효의왕후의 나인들을 고문했다고 전합니다. 1779년 9월 은퇴 상소를 올려 당일 수락되었고, 32세의 나이에 봉조하를 받아 '흑두봉조하'로 불렸습니다. 이후 당여가 서명응 탄핵을 시도했다가 도리어 축출되었고, 1780년 2월 김종수의 탄핵으로 방출되어 강원도 횡성과 강릉으로 유배되었으며 1781년 강릉에서 34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규장각 초기 설치에 관여하고 서얼 출신 사검서관의 서용에 힘썼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는 한편, 완풍군 양자설 같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19~20세기 야사일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홍양호(홍양호)와는 1778년 경흥부사로 나가게 된 일을 두고 마찰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1772년 문과에 급제해 세손의 서연을 맡았고, 정조 즉위 후 1776년 7월 도승지가 되었습니다.
1778년 누이가 원빈이 되었다가 급사하고, 1779년 9월 은퇴 상소가 당일 수락되었습니다. 1780년 방출되어 강릉에서 죽었습니다.
『한중록』 등 혜경궁 측의 기록은 그에게 부정적이므로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점을 위키백과는 함께 지적합니다.
강릉 교동에 묘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1985년 개발로 흔적을 찾기 어렵다고 합니다.
정조의 즉위를 도운 풍산 홍씨 도승지로 숙위소 대장을 맡아 4년간 실권을 쥐었습니다.
1779년 은퇴 상소를 올렸고 1780년 탄핵으로 방출되었으나 정확한 사정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1781년 강릉 유배지에서 34세로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