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말 좌의정, 혜경궁 홍씨의 숙부, 세손 대리청정에 반대했다가 사사됨
| 생몰 | 1722 ~ 1776 |
| 시대 | 조선 후기 |
| 본관 | 풍산 홍씨 |
홍인한(洪麟漢, 1722~1776)은 영조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 자는 정여(定汝)입니다. 위키백과는 출생을 1722년으로 적지만 인물 정보 상자에는 1721년 11월 30일로 되어 있어 자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예조판서 홍현보이며 이복형이 영의정 홍봉한이므로, 혜경궁 홍씨(혜경궁 홍씨)의 숙부입니다. 매형은 고구마를 들여온 조엄입니다. 1753년 정시문과에 병과 2등으로 급제했고 승정원 가주서·사간원 정언·교리 등 청요직을 거쳐 175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갔습니다.
1757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했고, 이후 승지·대사헌·도승지·호남안집사·경기도관찰사를 지냈으며 이조·병조·공조판서 등 6조 판서를 두루 거쳤습니다. 1773년 평안도관찰사를 지냈고 1774년 우의정, 1775년 좌의정에 올랐습니다. 전라도관찰사 시절 기생의 춤과 노래를 트집 잡아 곤장을 남발했다는 일화는 성대중의 『청성잡기』에서 비판적으로 전합니다. 실록에는 전라도에서 탐학했다는 소문이 실렸으나 구체적인 사실은 적혀 있지 않다고 합니다.
1775년 영조가 세손(훗날의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영조의 면전에서까지 반대했고, 세손이 '알 필요 없다'는 식의 이른바 '삼불필지'로 알려진 주장도 이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정후겸 등과 함께 세손 반대 여론을 조장하고 홍국영 등을 모함하는 상소도 올렸으나 서명선의 역탄핵으로 일이 뒤집혔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대리청정을 막지 말라고 편지를 보냈으나 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숙청이 시작되어 서명선 등의 탄핵으로 사판에서 삭제되고 문외출송되었으며, 여산과 고금도에서 위리안치된 끝에 사사되었습니다. 시신은 경기도 개풍군 봉곡마산에 묻혔고, 혜경궁 홍씨도 사사를 막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1832년 손자 홍백영의 호소는 거절되었고, 1855년 철종이 복권을 명했으나 반대로 취소되었으며, 1858년 다시 복권되었습니다. 홍국영과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그가 사사된 뒤 홍국영이 세도를 잡았습니다.
1753년 문과에 급제해 전라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와 6조 판서를 거쳐 1775년 좌의정에 올랐습니다. 전라도관찰사 시절 곤장을 남발했다는 일화가 『청성잡기』에 전합니다.
세손의 대리청정에 반대했다가 정조 즉위 후 탄핵되어 여산·고금도에 유배된 끝에 사사되었습니다. 1858년 복권되었습니다.
경기도 개풍군 봉곡마산에 묻혔다고 전합니다.
아들은 홍낙윤 등 자료마다 달라 확정하지 못했고, 손자 홍백영이 있습니다.
혜경궁 홍씨의 숙부로 영조 말 좌의정에 오른 풍산 홍씨 인물입니다.
세손(정조)의 대리청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정조 즉위 후 탄핵되었습니다.
1858년 복권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