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국공신에 올라 의원군에 봉해지고 좌군도총제·형조판서를 지낸 시중공파의 문신
| 생몰 | 1411 이후 |
| 시대 | 고려 말~조선 초 |
| 본관 | 창원 황씨 |
황거정(黃居正)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활동한 문신으로 본관은 창원입니다. 위키백과는 그를 고려 문하시중을 지낸 황충준(黃忠俊)의 후손으로 적고, 창원 황씨 대종회 계통의 설명에서는 공부상서 정토장군을 지낸 황신(黃信)의 아들로 소개합니다. 출생 연도는 확인되지 않으며, 시중공파(토황) 계통에서 처음으로 조선 건국 공신이 된 인물로 기억됩니다.
1392년 7월 17일 조선 개국에 참여했고, 같은 해 9월 27일 개국공신에 추록되어 의원군(義原君)에 봉해졌습니다. 이후 전라도 판군기감사를 거쳐 1396년(태조 5)에는 상의중추원사로 있으면서 시위 갑사의 비행을 문책한 일이 실록에 보입니다. 1401년(태종 1)에는 좌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고 하며, 1406년 참지의정부사, 1408년 명나라 사신, 그리고 좌군도총제와 형조판서 등을 지냈습니다. 태종 때까지 무반과 문반의 요직을 두루 거친 셈입니다.
그러나 말년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이 건국된 뒤 유배 중이던 이숭인이 곤장을 맞고 숨진 사건에 황거정이 관련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이 일이 1411년(태종 11) 알려지면서 하옥되고 공신 지위를 잃어 폐서인되었습니다. 대간이 극형을 거듭 요구했으나 재산을 몰수당하고 유배되었을 뿐 이후의 기록은 뚜렷하지 않습니다. 같은 해 부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태종이 쌀과 종이를 부조한 기록도 남아 있어, 공과 허물이 함께 전하는 인물입니다. 아들로 황효성(黃孝誠)이 알려져 있습니다.
개국공신은 1392년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좌명공신은 태종의 즉위를 도운 사람들에게 내린 공신 칭호로, 황거정은 두 공신 칭호를 모두 받았다고 전합니다. 이처럼 건국기와 태종 때 두 차례 공신이 되었다가 한순간에 지위를 잃은 이력은 조선 초 정치의 급변을 보여 줍니다. 이후 시중공파는 6대손 황림 대에 이르러 다시 높은 벼슬에 올랐으며, 자료마다 황거정의 계보와 공신 등급 서술이 조금씩 달라 족보와 대조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황거정은 1392년 조선 개국에 참여해 같은 해 9월 개국공신에 올랐고 의원군에 봉해졌습니다. 창원 황씨 중에서는 조선 건국기에 이름을 올린 첫 공신으로 꼽힙니다.
태종 때에는 좌명공신 3등에 책록되고 참지의정부사·좌군도총제·형조판서를 지냈으며, 1408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습니다. 다만 공신 책록 등급과 시기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1411년 이숭인의 죽음에 관여한 일이 드러나 공신 지위를 잃고 폐서인되었습니다. 이숭인은 유배 길에 곤장을 맞고 숨졌다고 전하며, 이 사건의 책임 소재는 사료 해석에 따라 설명이 갈립니다.
묘소의 위치는 이번에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아들로 황효성(黃孝誠)이 전하며, 6대손에 광국공신 황림이 있습니다.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으로 조선 개국공신에 올라 의원군에 봉해진 창원 황씨 시중공파 인물입니다.
의창(토황) 계통인 시중공파로 설명되며, 6대손 황림이 광국공신에 올랐습니다.
1411년 이숭인의 죽음에 관여한 일이 드러나 하옥되고 폐서인되었다고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