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혼·이이의 문인으로 일본에 사행하고 전라감사·호조판서를 지낸 공희공파의 문신, 호는 추포

| 생몰 | 1560 ~ 1617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창원 황씨 |
황신(黃愼, 1560~161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원,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입니다. 공희공파 황형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황대수, 어머니는 현풍 곽씨 집안의 딸로 전하고, 부인은 전주 이씨 원천군 이휘의 딸이라고 합니다. 성혼과 이이에게 배웠습니다. 출생 연도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가 1560년으로, 디지털부여문화대전이 1562년으로 적어 서로 다릅니다.
158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8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했습니다. 1589년 정여립 옥사 때 정언으로서 대신들의 직언 회피를 논박하다 1590년 고산현감으로 좌천되었고, 임진왜란 중에는 세자(광해군)를 따라 분조에 참여했습니다. 명나라 사신 양방형·심유경과 함께 일본에 다녀온 일이 있으며 이때의 기록이 『일본왕환일기』와 시집 『막부삼사수창록』으로 전합니다. 통신사 정사로 파견된 것으로 서술하는 자료도 있으나 같은 사행을 가리키는지는 문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전라도관찰사로서 전란으로 피폐한 남원의 복구에 힘썼고, 1601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스승 성혼을 변호하다 파직되었습니다.
1609년 공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지냈고, 1612년 위성공신 2등에 책록되어 회원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그러나 1613년 계축옥사 때 이이첨 쪽의 무고로 쫓겨나 옹진에 중도부처되었고, 1617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고 1629년 시호 문민(文愍)을 받은 것으로 전하며, 충남 부여에 묘소와 창강서원이 있습니다. 문집 『추포집』과 성리학 저술 『대학강어』가 남아 있고, 양자로 황일호를 들였다고 합니다.
부여의 추포 황신 선생 종가에는 1597년 전라도관찰사 겸 수군절도사 임명 교서 등 종가 유물이 전해지며, 국가유산 지정 해제 여부 등 정확한 현황은 이번에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또 계축옥사 때 이이첨이 과거 자신의 대사간 임명을 황신이 막은 일에 앙심을 품었다는 해석도 있으나 근거에 따라 설명이 달라, 하나의 원인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황신은 성혼과 이이에게 배웠고, 1601년 대사헌으로서 스승 성혼을 변호하다 파직되었습니다. 이는 서인 계열 학맥을 잘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이이와의 사승 관계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실려 있습니다.
임진왜란 중 명나라 사신과 함께 일본에 다녀왔으며 그 기록이 『일본왕환일기』입니다. 전라도관찰사로 남원 복구에 힘썼다고 합니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무고를 받아 옹진으로 쫓겨났고 1617년 유배지에서 숨졌습니다. 이이첨 쪽과의 악연은 자료마다 서술이 다릅니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저석리 일대)에 묘소와 창강서원이 있다고 합니다.
증조부는 황형이며, 형 계열 조카 황척의 아들 황일호를 양자로 들였다고 합니다.
성혼·이이의 문인으로 전라감사와 호조판서를 지내고 회원부원군에 봉해진 창원 황씨 공희공파 문신입니다.
호는 추포이며 『추포집』『일본왕환일기』『대학강어』 등이 있습니다.
충남 부여의 창강서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