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딸 화유옹주와 혼인해 창성위에 봉해지고 여섯 차례 이상 청나라 사행을 이끈 부마
| 생몰 | 1740 ~ 1802 |
| 시대 | 조선 후기 |
| 본관 | 창원 황씨 |
황인점(黃仁點, 1740~1802)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영조의 사위입니다. 본관은 창원, 시중공파 계통으로 호조참판을 지낸 황재(黃梓)의 셋째 아들이며 이조판서를 지낸 황인검의 이복동생입니다. 증조부는 숙종 때 이조판서에 오른 황흠입니다. 1751년(영조 27) 영조의 열째 딸 화유옹주와 혼인이 정해져 창성위(昌城尉)에 봉해졌습니다.
혼례를 앞두고 화유옹주의 이복 언니 화협옹주가 세상을 떠나 길례가 중지되었고, 1753년에야 혼인했으며 2년 뒤 출궁했습니다. 화유옹주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으나 1777년 아내가 종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조가 승하하자 애책문을 썼고, 정조가 즉위한 1776년부터 1793년까지 17년 동안 진하 겸 사은정사, 동지 겸 사은정사, 동지정사, 성절 겸 사은정사 등으로 청나라 수도 연경에 여섯 차례 다녀왔습니다. 다른 자료는 일곱 차례로 적어 횟수에 차이가 있습니다.
1784년 연경행에 동행했던 이승훈이 『천주실의』 등 천주교 서적을 들여온 일이 훗날 문제가 되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당시 정사로서 이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관직이 삭탈되었으며,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하교했다고 실록에 전합니다. 이듬해인 1802년 10월 4일 세상을 떠났고, 외아들 황기옥은 먼저 죽었습니다. 이 사건은 부마의 지위에 대한 조정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여 줍니다.
아버지 황재는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해 호조참판을 지냈다고 하며(부제학·대사헌을 지냈다고 적는 자료도 있습니다), 청나라에 다녀온 기록인 『갑인연행록』과 『경오연행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황인점이 훗날 수차례 연경에 간 것은 아버지의 연행 경험과 부마라는 지위가 함께 작용한 것으로 짐작되나 구체적 사정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1751년 혼인이 정해졌으나 화협옹주의 죽음으로 늦어져 1753년에 혼례를 올렸습니다. 화유옹주는 1777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일은 정순왕후 시절 신유박해까지 이어지는 부마 가문의 부침을 보여 줍니다.
정조 즉위(1776)부터 1793년까지 진하 겸 사은사, 동지사, 성절 겸 사은사로 연경에 여러 차례 갔습니다. 횟수는 여섯 차례 또는 일곱 차례로 자료마다 다릅니다.
1784년 천주교 서적이 들어온 일의 책임을 물어 1801년 관직을 삭탈당했습니다. 조정에서도 부마를 바로 처벌하는 데는 신중하자는 논의가 있었다고 실록은 전합니다.
묘소의 위치는 이번에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화유옹주와의 사이에 아들 황기옥(먼저 사망)과 딸이 있었고, 측실 소생의 딸이 김손근과 혼인했다고 합니다.
영조의 딸 화유옹주와 혼인해 창성위에 봉해진 창원 황씨 시중공파 부마입니다.
정조 때 여섯 차례 이상 정사로 연경에 다녀왔으며, 자료에 따라 일곱 차례로도 적습니다.
이조판서를 지낸 이복형 황인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