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처사, 호 남명, 경의학(敬義學)의 대가, 시호 문정

| 생몰 | 1501 ~ 1572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창녕 조씨 |
조식(曺植, 1501~1572)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창녕 조씨 출신입니다.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시호는 문정(文貞)입니다.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처사(處士)로 지내며,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경(敬)과 밖으로 옳음을 실천하는 의(義)를 학문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학풍은 흔히 경의학(敬義學)이라 부릅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1501년 경상도 삼가현 토골(지금의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서 아버지 조언형과 어머니 인천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지리산 자락 산청 덕산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학을 길렀으며, 문하에서 곽재우·정구 등이 나왔습니다.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학자로 꼽힙니다.
조식은 어려서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경전과 천문·지리·병법 등을 익혔다고 전합니다. 18세에 장의동으로 옮겨 성운·성수침 형제와 교유했고, 25세인 1525년 『성리대전』을 읽으며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화를 입고 아버지가 파직된 뒤 숨진 일을 겪고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1527년 부친상에는 3년간 시묘했고, 1531년에는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에 산해정을 지어 제자를 가르쳤습니다.
37세 때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를 치렀다가 낙방한 뒤로는 과거를 포기했습니다. 이후 헌릉참봉(1538년 또는 1539년으로 기록이 갈립니다)과 1555년 단성현감 등 여러 관직이 내려졌지만 대부분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이황과 이언적 등의 천거도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습니다.
1548년 이후에는 합천 삼가의 집 가까이에 계부당과 뇌룡사를 짓고 강학했습니다. 1555년 단성현감을 사양하며 올린 상소가 단성소(을묘사직소)입니다. 정치를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어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나, 대다수 대신과 사관은 나라를 걱정하는 충정으로 보아 그를 변호했다고 합니다.
1561년 지리산 덕산동으로 옮겨 산천재를 짓고 학문과 제자 양성에 전념했습니다. 문하에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와 정구 외에 정인홍·김우옹 등이 나왔고, 뒷날 북인 계열이 이 문하에서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이론 논쟁보다 실천을 중시한 탓에 이황과는 학풍 차이로 논쟁도 있었다고 서술됩니다.
1567년에는 명종의 부름에 응해 치국의 도리를 건의하고 돌아왔고, 1568년에는 '무진봉사'(무진대사)와 '서리망국론'을 올렸습니다. 1571년 선조가 식물과 전답을 내리자 사은소를 올렸습니다.
1572년 경상도 감영이 병세를 아뢰자 임금이 의원을 보냈으나 도착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종 때 제자들에게 경(敬)과 의(義)를 강조했다고 전합니다. 사후 선조 때 대사간에 증직되었고, 광해군 때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 문정을 받았습니다. 위키백과는 영의정 추증 연도를 1613년과 1615년으로 서로 다르게 적고 있습니다.
1576년 덕천서원에 배향되었고, 고향 삼가의 회현서원과 김해의 신산서원도 세워졌으며 세 서원 모두 광해군 때 사액을 받았다고 합니다. 북인이 몰락한 뒤 저평가되었다가, 흥선대원군이 집정한 1874년 이후 다시 평가되었다고 서술됩니다.
이만규는 『조선교육사』에서 그를 우리 교육사에서 가장 성공한 교육자로 평했고, 이익은 '우리나라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이라고 했다고 위키백과가 소개합니다. 2002년 동양철학 학계는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 10인에 그를 포함했습니다. 같은 문중의 인물로는 시조 조계룡과 파조 조익청이 있습니다.
묘소의 정확한 위치는 이 초안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산천재와 덕천서원 등은 '산청 조식 유적'(사적 제305호)에 포함됩니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호는 남명입니다.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처사로 지내며 경(敬)과 의(義)를 바탕으로 한 실천 중심의 학문을 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