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독립운동가·정치인,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조선민주당 당수 (호 고당)

| 생몰 | 1883 ~ 1950 |
| 시대 | 근현대 |
| 본관 | 창녕 조씨 |
조만식(曺晩植, 1883~1950)은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정치인으로 창녕 조씨 출신이며 호는 고당(古堂)입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1883년 2월 1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숭실중학교와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에서 공부했고, 1913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가 되어 1915년 교장을 맡았습니다.
1920년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만들어 국산품 애용 운동을 이끌어 '조선의 간디'로 불렸습니다. 신간회 평양지회장을 지냈고, 광복 후에는 조선민주당을 창당했으나 신탁통치에 반대하다 1946년 1월 연금되었습니다.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 조경학은 평양에서 물산객주 일을 하던 향반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조만식은 1904년 러일전쟁 피난 중 교회에 나가면서 개신교에 입문했고, 1905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 무렵 금연·금주에 성공해 평생 절제를 지켰다고 전합니다.
안창호의 연설에 감화되어 실력 양성이 독립의 길이라 믿고 일본 유학을 택했고, 메이지대학 법학과(전문부)를 1913년 3월 졸업했습니다. 간디의 비폭력·무저항 사상에 공감해 평생의 지표로 삼았다고 서술됩니다.
1913년 정주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했고, 1915년 교장이 되어 봉급 없이 8년간 학교를 이끌었다고 합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했습니다.
1920년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해 회장을 맡고 국산품 애용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1921년부터 1932년까지 평양 YMCA 총무를 지냈고,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참여해 평양지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1932년에는 조선일보 사장을 맡았으나 약 1년 만에 물러났습니다.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20여 일 만에 풀려났습니다.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지부를 이끌었고, 1945년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해 당수가 되었습니다. 반공과 신탁통치 반대 노선을 내세웠고, 소련군 측의 회유와 압박에도 끝까지 반대했다고 서술됩니다. 1946년 1월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서 물러나 고려호텔에 연금되었습니다.
남한 쪽의 월남 권유가 여러 번 있었지만 북녘 동포를 두고 떠날 수 없다며 거절했고, 1946년 5월 아내 전선애와 자녀들만 월남시켰다고 합니다.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숨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날짜는 10월 15일과 18일 설이 갈리고 경위에 대해서도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1970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76년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습니다. 1991년 국립서울현충원에 유발이 안장되었고 2000년 아내 전선애가 별세하자 곁에 합장되었습니다.
1943년 매일신보에 그의 이름으로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글이 실렸다는 점을 들어 친일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삼웅은 날조된 기사로 보며, 반대로 이 의혹이 북측의 정치 공세에 이용되었다는 시각도 있다고 소개됩니다. 같은 문중의 조봉암과 함께 근현대 창녕 조씨의 대표 인물로 꼽힙니다.
1920년 조선물산장려회를 만들어 국산품 애용 운동을 이끌고, 비폭력·무저항 사상을 지표로 삼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