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정치가, 초대 농림부 장관, 진보당 위원장 (호 죽산)

| 생몰 | 1898 ~ 1959 |
| 시대 | 근현대 |
| 본관 | 창녕 조씨 |
조봉암(曺奉岩, 1898~1959)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 창녕 조씨 출신이며 호는 죽산(竹山)입니다. 위키백과는 1898년 9월 25일 경기도 강화군 선원면에서 태어났다고 적고, 일부 자료는 출생 연도를 1899년으로 적습니다. 한자도 曺奉巖으로 쓰는 자료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농림부 장관 때 농지개혁안 마련을 이끌었고, 1952년과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며, 1956년 진보당을 창당했습니다.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기소되어 1959년 7월 31일 형이 집행되었고,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강화에서 태어나 1911년 초등학교를 마쳤으나 가난으로 진학하지 못했고, 군청 사환·대서보조원 등으로 일했습니다. 1919년 경성 YMCA 중학부에 들어가 여운형 등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서에 따르면 3·1운동에 참여해 1년간 투옥된 뒤 상하이로 망명했다고 하나, 이 대목은 출처 보완이 필요한 내용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1921년 일본 주오대학에 입학했고, 1923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25년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결성에 참여했습니다. 1926년에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책임비서를 맡았습니다.
1932년 9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되었고, 신의주 감옥에서 7년을 복역했습니다. 옥중에서 아내 김금옥의 병사 소식을 들었고 고문 후유증으로 손가락을 잃었다고 기록됩니다. 1939년 7월 출소했습니다.
1945년 8월 출소 후 인천에서 활동하다가 1946년 박헌영을 비판하는 공개 서한을 보내고 공산주의와 결별을 선언했으며, 같은 해 6월 조선공산당에서 제명되었습니다. 1948년 5·10 총선에서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이 되었고, 7월 24일 초대 농림부 장관에 취임했습니다.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를 이끌며 무상몰수·무상분배를 추진하려 했으나 지주 세력의 반대로 유상매수·유상분배 방식이 채택되었다고 서술됩니다. 1949년 2월 장관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국회부의장을 지냈습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습니다. 1956년 제3대 선거에도 무소속으로 나서 약 216만 표(이승만 약 504만 표)를 얻었다고 기록됩니다. 같은 해 11월 진보당을 창당하고 '책임 있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을 정강으로 내세웠습니다.
1958년 1월 진보당 간부들이 검거되었고, 조봉암은 간첩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습니다. 1심은 간첩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으나 2심이 사형을 선고했고 대법원이 이를 유지해, 1959년 7월 31일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판단해 재심을 권고했고,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재심에서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무기 소지 혐의는 유죄로 보되 형의 선고를 유예).
묘소는 서울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있으며, 앞의 비석에는 비문이 없습니다. 2001년 7월 강화읍 갑곶리에 추모비가 세워졌습니다. 같은 문중의 대표 인물로는 조만식이 있습니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망우산) 내 사색의 길 동락천 약수터 부근에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며 농지개혁안 마련을 이끌었습니다. 1959년 형이 집행되었고, 2011년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