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의 영수로 우의정에 올랐다가 경신대출척 때 사사된 문신, 호는 수촌

| 생몰 | 1632 ~ 1681 |
| 시대 | 조선 후기 |
| 본관 | 동복 오씨 |
오시수(吳始壽, 1632~1681)는 조선 숙종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복, 자는 덕이(德而), 호는 수촌(水村)입니다. 1648년 진사가 되었고 165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해 지평이 되었으며, 현종 때 여러 언관직과 승지직을 거쳐 전라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도승지를 지냈습니다.
숙종 초반 남인의 선봉장으로 활약했습니다. 1674년 무렵 서인을 몰아내는 데 중심 역할을 했고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했으며, 같은 남인 안에서 탁남의 영수 허적과도 대립했습니다. 1679년(숙종 5) 우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습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관직이 회복되었으나 갑술환국 이후 관작이 다시 추탈되었습니다. 저서로 『수촌문집』이 있고, 정종로가 『입재집』 권33에 신도비명을, 유명천이 『퇴당집』 권4에 묘지명을 남겼습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다르게 적혀(대백과 계통에서는 정원의 아들) 이 초안에서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오정위·오시복 등과 같은 시대의 동복 오씨 남인 관료입니다.
오시수는 남인 집권기의 정점에 있던 인물로, 서인을 몰아내는 데 앞장선 만큼 반대 세력의 공격도 거셌습니다. 경신대출척으로 사사된 뒤 기사환국 때 복권되고 갑술환국 때 다시 추탈된 과정은 17세기 말 환국 정치가 얼마나 급격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신도비명과 묘지명을 후대 남인 계열 학자들이 남긴 것은 그에 대한 평가가 정파에 따라 갈렸음을 시사합니다.
남인의 선봉장으로 서인 배척에 앞장섰고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했습니다.
『수촌문집』 원본 사진이 위키미디어 공용에 공개되어 있어 아래에 첫 쪽을 싣습니다.
출처: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계통 자료. 족보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묘소는 이 초안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1679년(숙종 5)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