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효자, 『삼가집』 저자, 호 삼가정·삼가당
동명이인 안내 — 같은 이름의 다른 인물:
박수량(朴守良) — 조선 전기 문신, 청백리·우참찬
| 생몰 | 1475 ~ 1546 |
| 시대 | 조선 중기(성종~명종) |
| 본관 | 강릉 박씨 |
박수량(1475~1546)은 자가 군거(君擧), 호가 삼가정(삼가당)인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강릉입니다. 아버지는 교수 박승휴, 어머니는 영해이씨 감찰 이중원의 딸입니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깊었고, 1504년(연산군 10)에 생원시(본문 다른 곳에는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모친상을 당해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았습니다. 연산군이 단상제(삼년상을 27일로 줄이는 제도)를 엄격히 시행하던 때에도 여막에서 삼년상을 끝까지 치렀고, 이 효행으로 1508년(중종 3) 효자 정려를 받았다고 합니다.
1516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강릉에 들른 김정과 교유했고, 1518년(중종 13) 현량과로 천거되어 충청도사·용궁현감·사섬시주부 등을 지냈습니다. 사은숙배 때 중종이 요순의 정치를 지금도 이룰 수 있느냐고 묻자 '인간의 본성은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 못할 이유가 없다'고 답했다고 전합니다. 용궁현감 때에는 오래 다투던 두 형제를 불러 타이르자 두 사람이 깨달아 소송 문서를 불살랐다고 합니다.
1519년 겨울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뒤, 당숙 박공달과 쌍한정에서 시와 술, 담론을 나누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문집 『삼가집』이 전하고, 묘소는 사천면 미노리에 있으며 교동의 향현사에 제향됩니다. 전남 장성 출신의 청백리 박수량(태인 박씨, 1491~1554)과는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입니다.
연산군 때 단상제를 따르지 않고 삼년상을 지킨 효행으로 1508년 효자 정려를 받았다고 합니다. 후손이 세웠다는 효자비와 효자각이 방동리에 있다고 소개됩니다(비의 건립 연도는 자료에 따라 다르게 전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하평마을 인물 항목은 1516년 강릉에 들른 김정에게 철쭉 지팡이를 받고 시로 화답하며 곧은 성품이 화를 부를까 염려했는데, 김정이 기묘사화로 사형을 당했다고 전합니다.
1520년 박공달과 쌍한정을 세워 함께 지냈고, 문집 『삼가집』에는 그의 시문이 전합니다. 쌍한정 정면 2칸·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 기와지붕 단층 누정입니다.
아버지 박승휴, 당숙 박공달, 제자로 소개되는 박억추, 후손 박사형이 있습니다.
강릉시 사천면 미노리에 있다고 합니다. 묘표비와 효자비·비각이 있다고 소개됩니다.
아닙니다. 강릉 박씨 박수량은 1475~1546, 청백리 박수량은 태인 박씨로 1491~1554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