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 소손녕과의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 확보의 길을 연 고려의 재상, 시호 장위

| 생몰 | 942 ~ 998 |
| 시대 | 고려 초기 |
| 본관 | 이천 서씨 |
서희(942~998)는 고려 초기의 문신이자 외교가로 본관은 이천, 자는 염윤, 시호는 장위(章威)입니다. 아버지는 내의령 서필이고 할아버지는 이천 서씨 시조 서신일입니다. 960년(광종 11) 과거에 급제해 광평원외랑·내의시랑을 거쳐 983년 병관어사가 되었고, 뒤에 내사시랑평장사와 태보·내사령에 이르렀습니다.
993년(성종 12) 거란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주장과 서경 이북을 떼어 주자는 할지론이 나왔습니다. 서희는 이에 반대하고 직접 적진으로 가 소손녕과 담판했습니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소손녕이 뜰에서 절하라고 요구하자 두 나라 대신이 만나는 자리에 맞지 않는다며 거부해, 마루에 올라 대등한 예를 갖추기로 했다고 합니다.
서희는 거란의 속뜻이 고려와 송의 관계를 끊는 데 있음을 간파하고, 고려가 고구려를 이은 나라이며 압록강 안팎 땅은 여진이 길을 막고 있어 교통할 수 없다는 논리로 거란을 설득했습니다. 그 결과 거란군은 싸우지 않고 물러났고 고려는 압록강 하류 쪽 강동 지역을 개척할 명분을 얻었습니다. 998년 세상을 떠났고, 1027년(현종 18)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서희의 담판은 흔히 '말 한마디로 강동 6주를 얻었다'고 소개되지만, 학계와 해설에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외교부 기고문 등은 서희가 압록강 남쪽 강동 280리를 얻어 국경을 압록강까지 넓혔다고 평가합니다. 반면 일부 해설은 담판 자체에서 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진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할 '기회'를 얻은 것이 핵심 성과라고 설명합니다.
서희는 이후 여진을 몰아내며 압록강 남쪽 일대에 성을 쌓는 일을 맡았다고 전합니다. 이처럼 외교와 실제 축성이 이어졌다는 점에서, 서희를 '군사와 외교를 함께 다룬 재상'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여주시 산북면 후리의 서희 묘는 부인과 합장한 묘로, 3단의 묘역에 상석·장명등·문무인석이 갖춰져 있고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천서씨 대종회가 '서희 장군 묘'라는 명칭의 '장군' 표기를 바꿔 달라고 신청했으나 경기도문화재심의위원회에서 부결되었다는 보도가 2024년에 있었습니다.
이천시 중리동의 서희동상오거리에는 서희 동상이 서 있습니다. 1965년에 세운 옛 동상을 60여 년 만에 교체했고, 새 동상은 높이 약 10m이며 2015년 국가표준영정 제95호로 지정된 '장위공 서희 영정'을 바탕으로 고려 성종 때의 복식을 반영했다고 합니다. 이천 모가면에는 서희 테마파크가 있고, 이천시는 해마다 장위공서희문화제를 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천 설봉서원은 서희를 모신 서원입니다.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후리 (서희장군묘, 경기도기념물 제36호, 1977년 지정). 이천에는 설봉서원이 있다.
아들 서눌은 문하시중에 올랐고, 서유걸·서유위·서주행 등도 전합니다. 손녀 원목왕후는 현종의 제6비가 되었으며, 손자 서정은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습니다. 후손 서공 등이 고려 중기까지 재상을 이었습니다. 본관 이천 서씨 문서도 함께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