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돈 辛旽

공민왕 때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토지·노비 개혁을 추진한 승려 출신 집정자, 법명 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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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1322 ~ 1371
시대고려 후기
본관영산 신씨

생애 약력

신돈(辛旽, 1322~1371)은 고려 후기의 승려이자 관료로, 경상도 영산현(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출신이며 본관은 영산입니다. 법명은 편조(遍照), 환속한 뒤의 이름이 돈(旽)이고 자는 요공, 호는 청한거사입니다. 위키백과는 생년을 1322년 또는 1323년으로 달리 적는데, 이 문서에서는 1322년으로 표기합니다. 아버지는 신원경이라는 설과 신예라는 설이 있어 분명하지 않고, 어머니는 옥천사의 사비(寺婢)였다고 전하며, 영산의 유력한 신씨 가문의 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려서 출가했지만 신분 때문에 배척을 받아 떠돌이 승려로 지냈다고 합니다. 1358년(공민왕 7)쯤 김원명의 소개로 궁궐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1364년 무렵 공민왕을 만나 왕사가 되었습니다. 1365년 왕비 노국대장공주가 세상을 떠나 공민왕이 불사에 몰두하자 국정을 맡게 되었고, 같은 해 7월 환속해 영문하부사, 판감찰사사 등 요직을 겸했습니다.

1366년 5월에는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권세가가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양인으로 되돌리는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성균관을 다시 짓고 이색을 대사성으로 천거해 신진 유학자를 후원했으며, 개경의 귀족 세력을 견제하려고 천도를 건의했으나 반대에 부딪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1369년 충주 천도 건의도 무산). 순자격식으로 권세가 자제의 급속한 승진을 막으려 한 것도 이 시기의 일입니다.

개혁으로 기득권을 잃은 권문세족의 반발이 컸고, 공민왕도 신돈의 권세가 왕권을 위협한다고 보아 1370년 무렵 친정 의사를 밝히며 멀어졌습니다. 1371년 역모 고변을 계기로 수원부에 유배되었고, 같은 해 음력 7월 11일 처형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나라를 어지럽힌 요승으로 그려졌으나, 1970년대 이후 개혁가로 다시 평가하는 시각이 나왔고 평가는 지금도 엇갈립니다.

전민변정도감 개혁

1366년 설치한 전민변정도감은 권세가가 겸병한 토지를 되돌리고 노비가 된 양인을 풀어 주려는 기구였습니다. 노비안검법을 되살렸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집안과 평가

같은 영산 신씨의 신예·신부와 형제로 소개되는 자료가 있으나 가계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평가는 요승과 개혁가로 갈립니다.

묘소

처형된 뒤의 묘소 위치는 이 자료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창녕 영산에는 그와 관련된 옥천사지가 있다고 전해집니다.

후손

아들이 한 명 있었으나 처형 당시 두 살이었다고 전합니다. 우왕이 신돈의 후손이라는 설은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려는 세력이 만든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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