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혜왕·충목왕 때 정방 제조로 권세를 누려 '신왕'이라 불린 문신, 취성부원군
| 생몰 | 1355 |
| 시대 | 고려 후기 |
| 본관 | 영산 신씨 |
신예(辛裔, ?~1355)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영산입니다. 조부는 도첨의찬성사를 지낸 신혁, 아버지는 합문지후를 지낸 신원경이며, 동생으로 신부·신순·신귀·신돈이 전해집니다. 위키백과는 신돈을 신예의 동생으로 적지만, 신돈의 아버지가 신원경인지 신예인지는 자료에 따라 갈려 가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을 함께 알려 둡니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충혜왕 때 좌정언과 지신사를 거쳐 첨의평리에 올랐습니다. 연도는 기록에 없지만, 매부인 환관 고용보와 함께 원나라 사신이 충혜왕을 압송하는 일을 도운 것으로 『고려사』에 전합니다. 『고려사』 권125 간신전에 실린 인물이라는 점에서 당대와 후대의 평가가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45년(충목왕 1) 정방을 다시 설치할 때 참리로서 제조관이 되었습니다. 정방은 인사 행정을 맡던 기구로, 신예가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며 인사를 좌우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신왕(辛王)'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같은 시기 정사도가 신예에게 아첨해 승진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충목왕 때 취성부원군에 봉해졌고, 1355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의 경위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동생 신부가 홍건적과 싸우다 전사한 것과 달리 신예는 권력과 연결된 부정적 이미지로 남았으며, 영산 신씨가 고려 후기에 크게 번성했다가 신돈의 몰락 이후 급격히 쇠퇴했다는 서술 속에서 함께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다만 기록이 간략해 개인적인 성품이나 학문은 전하지 않으며, 행적도 대부분 인사 권한과 관련한 서술에 한정됩니다. 이 문서는 위키백과와 『고려사』 기록을 바탕으로 했으며, 생년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정방은 고려 후기 인사 행정 기구입니다. 신예가 오래 머물러 인사를 좌우해 '신왕'이라 불렸다는 서술은 『고려사』 간신전에 근거합니다.
동생으로 신부와 신돈이 전하나, 신돈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묘소는 이 자료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