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무장, 삼도도순변사 (시호 충장)

| 생몰 | 1546 ~ 1592 |
| 시대 | 조선 |
| 본관 | 평산 신씨 |
신립(申砬, 1546~1592)은 조선 중기의 무장으로 평산 신씨이다. 1567년 무과에 급제하고 1583년 온성부사로서 여진족 니탕개의 침입을 격퇴해 이름을 떨쳤으며, 뛰어난 기병 지휘관이자 명궁으로 알려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로 충주에 내려갔다. 조령에서 막자는 건의에도 달천 평야를 등진 탄금대에 진을 쳤으나, 1592년 음력 4월 28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에게 크게 패하고 남한강에 투신해 순국한 것으로 전한다(일본 측 기록은 참수로 적는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장이다. 전술 판단을 두고 지금도 평가가 엇갈린다.
신립(申砬, 1546~1592)은 평산 신씨로, 자는 입지(立之)이다. 1546년(명종 1) 음력 10월 23일 아버지 신화국(申華國)과 어머니 파평 윤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전한다. 시조 신숭겸의 후손이며, 5대조는 좌의정을 지낸 신개이다.
아버지 신화국은 생원 출신으로, 아들의 공으로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고 한다. 형제로는 호성공신에 오른 형 신잡, 신급, 동생 신할이 있고, 누이 신지향의 딸이 뒷날 인조를 낳은 정원군(원종)의 부인이 되어 인조는 신립의 외생질이 된다. 다만 형제 서열과 인척 관계 서술은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1567년(선조 즉위년) 22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나무위키는 식년시 병과 14위로 적고 있다. 이후 선전관을 거쳐 진주판관 등 여러 무관직을 지냈고, 이 무렵 양응정에게 글을 배웠다고 전한다.
관직 이력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587년 무렵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복직했으나, 부하를 처벌한 일 등으로 다시 한직으로 밀려났다는 기록이 있다. 1590년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고 하나, 자료마다 시기와 직책 서술에 차이가 있다.
1583년 온성부사로 있을 때 여진족 니탕개(尼湯介)가 두만강 일대를 침입하자 기병을 이끌고 맞서 격퇴하여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이 승리가 이후 기병전에 대한 그의 자신감의 바탕이 되었다는 평가가 많다.
일부 자료는 1584년에 북도병사에 임명되었다고 적는다. 당시 함경도는 여진과 맞닿은 최전선이어서 북방 근무 경력은 무신에게 큰 명성의 원천이 되었다.
신립은 당대에 뛰어난 궁술과 기병 지휘 능력으로 이름난 무장으로 꼽혔다. 북방의 승전과 함께 '조선 제일의 장수'로 기대받았고, 조정이 왜란 초기에 그에게 마지막 방어의 책임을 맡긴 것도 이런 평판 때문이라고 이해된다.
한편 부하에게 엄격했다는 기록도 있어, 용맹과 위엄이라는 평가와 가혹함이라는 비판이 함께 전한다.
1592년 4월 일본군이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하고 북상하자 신립은 삼도도순변사에 임명되어 선조에게 상방검을 받았다. 김여물을 종사관으로 삼아 도성에서 병력을 모아 충주로 내려갔다. 병력 규모는 기록마다 달라 8천 명 내외에서 1만 6천 명까지 추정된다.
신립은 4월 26일경 충주에 도착해 단월역에 병력을 두었다. 상주에서 패하고 물러온 순변사 이일을 처벌하려다 선봉에서 공을 세우라며 용서했다고 전한다. 한편 1591년 비변사 논의에서 수군 폐지를 주장했으나 이순신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서술이 있다(출처 확인 필요).
종사관 김여물은 험준한 조령(새재)에 진을 치고 높은 곳에서 활로 적을 막자고 건의했고, 이종장·이일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일은 한강 방어선을 주장했다고도 한다.
신립은 일본군이 보병이고 조선군은 기병이니 넓은 평야로 적을 끌어들여 기병으로 싸우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 달천 평야를 등진 탄금대 부근에 진을 쳤다. 민간에는 신립이 처녀의 혼령이 시킨 대로 탄금대를 택했다는 전설도 있으나 사실로 보기 어렵다.
1592년 음력 4월 28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이 단월역 방면에서 들이닥쳤다. 논이 많고 질척한 지형에서 기병은 기동하기 어려웠고, 일본군은 좌우에서 조총과 활로 조선군을 에워쌌다. 신립은 두세 차례 돌격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대열이 무너지자 조선군은 달천과 남한강 쪽으로 몰려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조선 측 기록은 신립이 김여물과 함께 강에 투신해 죽었다고 전한다. 반면 프로이스의 『일본사』나 『회본태합기』 등 일본 측 기록은 그가 참수되었다고 적어 최후에 관한 견해가 갈린다. 사망 시 나이도 45세 또는 47세로 자료마다 다르다.
이 패배로 일본군은 한성으로 빠르게 진격했고 선조는 도성을 떠나 몽진하였다. 사상자 수치는 기록마다 크게 달라 정확한 수를 단정하기 어렵다.
비판하는 쪽은 지형을 고려하지 않고 기병 돌격에 의존했으며, 요충인 조령을 버렸고 부하와 소통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정찰 보고를 가져온 군관을 처형한 일도 판단 착오의 사례로 거론된다.
옹호하는 쪽은 조령을 지켰더라도 일본군의 우회와 협공으로 결과가 크게 달랐으리라 단정할 수 없고, 신립이 이끈 병력은 급조된 오합지졸에 가까워 상비군과 보급 체계의 한계가 패배의 근본 원인이었다고 본다. 이처럼 두 견해는 학계와 대중 사이에서 지금도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평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에 있는 신립장군묘로, 1986년 경기도 기념물 제95호로 지정되었다.
묘비는 송시열이 글을 짓고 신익상이 글씨를 써서 1703년(숙종 29)에 세웠다고 한다. 곤지암 일대에는 신립의 시신을 옮기던 길에 얽힌 지명 전설도 전해 온다.
신립은 전주 이씨와 전주 최씨를 아내로 맞았다고 전한다. 장남 신경진은 인조반정에 가담한 공신으로 영의정에 올랐고, 차남 신경유와 삼남 신경인이 있었다. 딸 신제순은 선조의 아들 신성군의 부인이 되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신익희는 신경인의 12대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립의 행적은 『선조실록』과 유성룡의 『징비록』, 『난중잡록』 등에 전하며, 일본 측 기록으로는 프로이스의 『일본사』, 『회본태합기』 등이 있다. 충주 탄금대에는 이 전투를 기억하는 공원과 유적이 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4)에서는 무능한 장수로, 「징비록」(2015)에서는 나름의 합리성을 지닌 인물로 그려져 시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짐을 보여 준다.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에 신립장군묘가 있으며 1986년 경기도 기념물 제95호로 지정되었다.
장남 신경진은 인조반정 공신으로 영의정에 올랐고, 후손 신익희는 신경인의 12대손으로 기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