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의 문인으로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를 받은 의성의 학자, 호 회당, 사후 호조참의 추증
| 생몰 | 1576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아주 신씨 |
신원록(申元祿, ?~1576)은 조선 중기 의성의 학자로 본관은 아주, 호는 회당(悔堂)입니다. 신흘(신흘)의 아버지이며 퇴계 이황(이황)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자는 申元錄으로도 적히므로 병기합니다. 출생 연도는 확인하지 못했고, 1576년에 사망했다고 전합니다.
그의 효행은 조정에 알려져 《속삼강행실》에 실렸고, 마을에 효자문이 세워졌습니다. 의성군 문화유산 안내는 1603년 복호(세금·부역 면제)의 은전이 내려졌고 1615년 정려가 내려지면서 통정대부 호조참의에 증직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후손 쪽 기록은 사후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고만 전합니다.
효행과 함께 학문과 교육에도 힘썼습니다. 업유재를 창건하고 빙계서원의 전신인 장천서원을 14년 만에 세웠으며, 지역 백성을 위한 향약도 새로 제정하는 등 16세기 의성 문풍의 중흥을 이끈 선비로 평가됩니다. 그의 종가는 불천위를 모시고 있고, 의성읍 팔성리에는 불천위 사당이, 도동리에는 효자정려각이 있습니다.
의성군은 효자신원록정려각(도동리)을 2013년 의성군 문화유산 제1호로, 불천위 사당(팔성리)을 2017년 제39호로 지정했습니다. 정려각의 건립 시기는 광해군 8년(1616)이라는 안내와 1656년이라는 안내가 갈립니다.
업유재와 장천서원을 세우고 향약을 정비하면서 지역 교육과 풍속의 기틀을 닦았다고 전합니다. 이는 효를 학문과 향촌 질서로 이어 간 사례로 읽힙니다.
그의 글을 모은 《회당선생문집》과 부록이 전해지며, 문집에는 한자가 申元錄으로 적혀 있습니다. 벽사 이우성이 1988년 사적비 비문을 지으면서 그의 덕업을 충효와 의리, 위기지학(자기 수양을 위한 학문)을 실천한 것으로 요약했다고 소개됩니다. 그는 의성이 16세기에 문향으로 일어서는 데 기여한 선비로 기려집니다.
묘소의 위치는 확인한 자료에 나오지 않습니다. 의성읍 팔성리 812-1에 불천위 사당(의성군 문화유산 제39호), 도동리 631에 효자신원록정려각(제1호)이 있습니다.
아들 신흘은 임진왜란 때 의병에 참여했고, 신흘의 아들들이 문신으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1988년 사적비가 세워졌고 비문은 이우성이 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