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의 문인으로 역학과 성리학에 밝았던 청주의 학자, 호 용애, 《용애문집》
| 생몰 | 1643 ~ 1728 |
| 시대 | 조선 후기 |
| 본관 | 아주 신씨 |
신응태(申應泰, 1643~1728)는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아주, 초명은 응개(應漑), 자는 길래(吉來), 호는 용애(龍崖)입니다.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고, 신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광주 반씨 반봉익의 딸입니다. 효자로 이름난 신지익의 손자이며 송시열(송시열)의 문인입니다.
5세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향시에는 여러 번 합격했지만 과거에는 끝내 오르지 못했고, 뜻을 바꾸어 학문 연구에 전념해 역학과 성리학에 깊이 들어갔으며 천문과 역수에도 밝았습니다.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사사되자 이에 항변하는 상소문을 써서 대궐 앞에서 시위하는 등 스승의 신원을 위해 애썼고, 명나라 신종을 제사 지내자는 유림의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만년에는 후진 양성에 힘써 문하에서 많은 학자가 나왔습니다. 저서로 《용애문집》 4권 1책이 있고 《사서제요도설》 등의 저술을 남겼다고 전합니다. 1958년 검암서원이 중건되면서 추향되었습니다.
역학과 성리학, 천문·역수까지 두루 공부한 것으로 전해지며, 과거를 포기하고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써 문하에서 많은 학자가 나왔습니다.
송시열이 사사된 뒤 항변 상소와 시위로 스승의 신원을 위해 애썼고, 명 신종 제사 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노론계 유림의 입장을 대변하는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 신심은 신지익과 함께 삼효각에 정려된 효자이고, 어머니는 광주 반씨 반봉익의 딸입니다. 할아버지의 효행과 아버지의 효행이 이어진 집안에서 자라 5세에 아버지를 잃고도 어머니를 모셨다고 전합니다. 1694년 창건된 청주 검암서원은 1871년 철폐되었다가 1958년 중건되면서 그를 추향했고, 지금은 청주시 향토유적 제31호입니다.
묘소의 위치는 확인한 자료에 나오지 않습니다.
아버지 신심, 할아버지 신지익으로 이어지는 효자 가문의 후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