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경상우수사·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수군 장수,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 선무공신 1등

| 생몰 | 1540 ~ 1597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원주 원씨 |
원균(元均, 1540~1597)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원주이고 자는 평중(平仲)입니다. 위키백과는 1540년 2월 12일 경기도 진위현 영신현(현 평택시 도일동)에서 태어났고 1597년 8월 27일(양력, 추정) 무렵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적습니다. 아버지는 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 어머니는 남원 양씨이며, 아들로 원사웅이 있습니다. 1567년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과 함경도 조산보 만호를 거쳤고, 여진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종성부사가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는 경상우수사였습니다. 경상좌수사 박홍이 달아난 뒤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했고, 옥포·당포·한산도 등의 해전에 함께 참전했습니다. 다만 한산도대첩 뒤 이순신이 단독으로 장계를 올리면서 두 사람의 갈등이 깊어졌다고 서술됩니다. 1594년 이후에는 육전 참여를 거부하는 등의 문제로 충청병사, 이어 전라병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선조가 이순신을 파직하자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고, 선조의 공격 명령에 따라 출진했다가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크게 패했습니다. 원균은 고성의 춘원포에서 전사한 것으로 전합니다.
사후 평가는 시대에 따라 크게 달랐습니다. 선조는 그를 선무공신 1등에 책록하고 좌찬성을 추증해 원릉군에 봉했습니다. 그러나 정조 대 이후 이순신이 신격화되면서 원균은 상대적으로 부정적으로 그려져 왔습니다. 1980년대 이후 원주 원씨 문중과 평택 향토사학계를 중심으로 재평가 주장이 이어졌으나, 혈연·지연에 얽혀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함께 제기됩니다. 칠천량 패전의 책임이 원균 개인에게 있는지, 조정의 출진 강요와 전략 판단에도 있는지를 두고 지금도 의견이 갈립니다. 평택에는 원균을 모신 사당(평택시향토유적 제6호)과 유품을 묻은 가묘로 추정되는 원균장군묘가 있으며, 실제 무덤은 거제·고성 일대에 있다는 설도 전해집니다.
경기도 진위현 영신현 출신으로 1567년 무과에 급제해 함경도 변경에서 여진과 싸운 공으로 종성부사에 올랐습니다.
1592년 경상우수사로서 이순신의 구원을 청해 옥포·당포·한산도 등 해전에 함께했습니다. 한산도대첩 뒤 이순신의 단독 장계를 계기로 두 사람의 갈등이 깊어졌다고 합니다. 이순신 쪽 서술과 원균 쪽 서술이 상당히 다르므로 한쪽 기록만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선조의 출진 명령에 따라 나갔다가 7월 칠천량에서 크게 패했고 고성 춘원포에서 전사했다고 전합니다.
선조는 선무공신 1등에 책록하고 좌찬성을 추증했으며 원릉군에 봉했습니다. 후대에는 비판이 컸으나 문중과 평택 향토사학계의 재평가 주장이 나왔고, 객관성을 의심하는 비판도 함께 있습니다.
평택의 원균사당(평택시향토유적 제6호)과 원균장군묘가 알려져 있습니다. 위키미디어 공용에는 원균 편지(간찰)가 434년 만에 평택으로 돌아왔다는 설명이 붙은 사진과 선무공신 교지 사진이 올라 있습니다.
평택의 원균장군묘는 유품만 묻은 가묘로 추정되며, 실제 무덤은 거제·고성 등지에 있다는 설이 전해집니다. 평택시에는 원균사당(평택시향토유적 제6호)이 있습니다.
아들 원사웅이 있습니다. 종친회는 그를 원성백계 20세, 삼사좌윤공파로 분류합니다.
임진왜란 때 경상우수사와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고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원주 원씨 무신으로, 선무공신 1등에 책록되었습니다.
이순신과의 갈등과 칠천량 패전 때문에 후대에 부정적으로 그려졌으나, 1980년대 이후 문중과 일부 향토사학계에서 재평가 주장이 나왔고 객관성 비판도 있습니다.
평택의 원균장군묘가 유품을 묻은 가묘로 추정되며 거제·고성에 실제 무덤이 있다는 설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