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강원도 조방장으로 여주 남한강에서 왜군의 도강을 막은 무신, 시호 충장
동명이인 안내 — 같은 이름의 다른 인물:
원호(元昊) — 단종 폐위에 분개해 은거한 생육신의 한 사람, 집현전 직제학, 호 관란, 시호 정간

| 생몰 | 1533 ~ 1592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원주 원씨 |
원호(元豪, 1533~1592)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원주이며 시호는 충장(忠壯)입니다. 아버지는 원송수(元松壽), 어머니는 순흥 안씨로 전하는데, 아버지를 열 살 이전에 여의었다고 합니다. 양주 평구의 김덕수에게 학문을 배웠고 윤두수·윤근수 형제와도 가까웠다고 합니다. 문과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다 1567년 무과에 급제해 경원부사·경흥부사 등 함경도 북변의 고을을 맡았고, 1583년 니탕개의 난을 평정하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이때 한겨울에 하루 종일 활을 쏘다 손가락이 잘려 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1587년 전라우수사로 있을 때 손죽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제대로 막지 못해 배를 잃고 강진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다시 하급 관직을 지내고 물러났다고 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 조방장에 임명되어 한양으로 통하는 동쪽 길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선봉이 충주에서 신립의 군대를 꺾고 여주·양근을 거쳐 서울로 향하자 원호는 약 300명의 군사로 여주 신륵사 일대(벽사) 나루를 지켜, 왜군이 강을 건너려 할 때마다 공격해 며칠 동안 도강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강원도 관찰사 유영길이 '본도 방어'를 이유로 그를 불러들이자 왜군은 비교적 쉽게 남한강을 건넜습니다. 그 뒤 원호는 다시 남한강으로 돌아와 향병을 모아 게릴라식 전투를 이어 갔고, 양평 개군 구미포 나루에서 야간 기습으로 50여 명의 목을 베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영길이 다시 그를 불러들였고, 함경도를 휩쓸고 강원도로 내려온 왜군을 막으라는 명을 받아 김화로 나아갔습니다. 시마즈 도요히사의 부대가 숨겨 둔 복병에게 포위되어 격전 끝에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져 순국했다고 전하며, 1592년 6월 19일(음력)로 적는 자료가 있습니다. 사후 병조판서와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장입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그의 죽음 뒤 강원도에 적을 막을 만한 사람이 없어졌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김화의 충장사와 원주의 충렬사에 모셔졌고, 1990년 신륵사 일주문 부근에 임진전승비가 세워졌습니다. 아들 원유남과 손자 원두표는 인조반정의 공신이 되었습니다.
1567년 무과에 급제해 경원·경흥 등 함경도 북변의 고을을 맡았고 1583년 니탕개의 난 진압에 참여했습니다. 1587년 손죽도 왜변 때의 책임으로 유배된 일도 있습니다.
임진왜란 초 약 300명으로 신륵사 일대 나루를 지켜 왜군의 도강을 며칠 늦췄다고 합니다. 이후 관찰사의 소환과 복귀가 되풀이되는 가운데 구미포 기습 등 여러 차례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 소환을 당쟁과 연결해 보는 견해도 있으나 기사는 그런 시각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1592년 6월 김화에서 복병에게 포위되어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졌다고 전합니다. 『징비록』은 이후 강원도에 적을 막을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적었습니다.
병조판서·좌의정에 추증되고 충장 시호를 받았으며, 김화 충장사와 원주 충렬사에 모셔졌습니다. 1990년 신륵사 일주문 부근에 박종화가 비문을 지은 임진전승비가 세워졌습니다.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장암리에 있습니다. 이곳은 원래 강원도 원주 땅이었으나 1914년 경기도에 편입되었고, 손자 원두표의 묘와 함께 '원호·원두표 묘역'으로 불립니다.
아들 원유남, 손자 원두표가 이어졌고, 종친회는 시중공계 14세로 원산군 음성공파에 속한다고 소개합니다.
임진왜란 때 강원도 조방장으로 여주 남한강에서 왜군의 도강을 막고 김화에서 순국한 원주 원씨 무신입니다.
원두표는 원호의 손자로 알려져 있으며 둘의 묘역이 여주에 함께 있습니다.
아닙니다. 생육신 원호는 한자가 元昊이고 1397~1463년에 산 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