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민의회·임시정부 활동 독립운동가, 광복 후 한민당·민족자주연맹 정치인, 제2대 국회의원, 호 춘곡
| 생몰 | 1887 ~ 1959 |
| 시대 | 일제강점기~대한민국 초기 |
| 본관 | 원주 원씨 |
원세훈(元世勳, 1887~1959)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뒤의 통일운동가·정치인으로 본관은 원주이고 호는 춘곡입니다. 1887년 7월 10일 함경남도 정평에서 태어났고, 평안남도 평양의 대동법률전문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동명이인(1951년생)과는 다른 인물이니 혼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1910년대 후반 연해주에서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를 조직하고 1919년 초 대한국민의회로 확대하는 데 참여한 것으로 연구됩니다. 1919년 대한국민의회 대표로 선정되어 상하이로 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통합을 교섭했고, 그해 9월 통합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 관여했습니다. 이후 임시정부의 분열 위기 속에서 1920~1924년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정부 개혁을 시도했으며, 새 정부 수립이 어려워지자 민족유일당 운동에 힘을 쏟았습니다. 1925년에는 소련이 일본과의 밀약에 따라 한국 민족주의자들을 추방할 때 함께 쫓겨났다고 합니다. 그의 활동은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실려 있습니다.
1945년 광복 뒤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반탁 운동 단체에서도 활동했으며 이승만 지지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한민당 대표 자격으로 좌우합작에 참여했으나 당내 반발이 일자 민족자주연맹으로 옮겼고, 1948년 김구·김규식과 함께 평양을 찾은 남북협상에 참여했습니다. 협상이 성과를 내지 못하자 이를 인정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일화로, 1945년 말 기업인 김연수가 경성방직을 맡아 달라며 정치자금을 가져왔으나 일본 군국주의의 때가 묻었다며 받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중 납북되었고,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지내다 1959년 12월 25일 평양에서 병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함경남도 정평 출신으로 평양 대동법률전문학교를 졸업했고, 연해주에서 전로한족회와 대한국민의회 조직에 참여한 것으로 연구됩니다.
1919년 대한국민의회 대표로 상하이에 와 임시정부와 통합을 교섭했고, 1920~1924년 국민대표회의로 정부 개혁을 꾀했습니다.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좌우합작에 관여하다 민족자주연맹으로 옮겼으며,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했습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중 납북되어 1959년 평양에서 병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납북된 뒤 평양에서 병사한 것으로 전해지며, 묘소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대한국민의회와 임시정부 통합에 관여한 독립운동가로, 광복 후 한민당·민족자주연맹에서 활동했고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습니다.
아닙니다. 1951년생 동명이인과는 다른 인물입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실려 있으나, 서훈 등급과 연도는 이번에 확인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