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탁 梁起鐸

대한매일신보를 이끈 언론인이자 신민회·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호는 우강

양기탁, 1934년
양기탁, 1934년 · Public domain (독립기념관 소장 사진, 1934)
생몰1871 ~ 1938
시대근현대
본관남원 양씨

생애 약력

양기탁(1871~1938)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남원 양씨입니다. 호는 우강(雩岡)·운강(雲崗)이며, 평안도 강서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자료에 따라 출생지 표기가 다르고, 사망일도 4월 19일·20일로 갈립니다.

관립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익히고 게일 선교사의 한영사전 편찬을 도왔으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했습니다. 1904년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과 함께 신문을 펴내고 이듬해 국한문 『대한매일신보』 창간에 참여해 항일 논조를 이끌었습니다. 국채보상운동 모금에도 깊이 관여했습니다.

1907년 신민회에 참여해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을 추진했고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습니다. 1920년대에는 만주에서 의성단을 조직하고 여러 독립운동 단체 결성에 관여했으며, 1933~193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냈습니다. 1938년 중국 장쑤성에서 별세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신문 활동과 국채보상운동

양기탁은 영어에 능통해 1904년 궁내부 통역관으로 일하며 베델과 함께 영자 신문을 펴냈고, 1905년 국한문 『대한매일신보』 창간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이 신문은 외국인 발행인 덕에 일제의 검열을 상대적으로 피하며 항일 논조를 이어갔습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모금을 주관하던 중 횡령 혐의로 구속되었으나 무죄로 밝혀졌다고 전합니다.

신민회와 105인 사건

1907년 신민회 창립에 참여해 안창호·신채호 등과 함께 활동했습니다. 1910년 만주에서 독립군 기지 후보지를 살폈고, 안악 사건과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1915년 출옥했다고 합니다.

만주 활동과 임시정부

1918년 톈진에서 체포되어 거금도에 유배되었다가 1919년 풀려났고, 1920년 만주로 탈출해 의성단을 조직했으며 통의부·정의부 등의 결성에도 관여했다고 합니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맡았고, 민족유일당 운동 끝에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했습니다. 1937년에는 조선혁명당을 재건해 당수가 되었습니다.

서훈과 가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생부는 양시영이며 숙부 양시욱에게 입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원 양씨 일가의 인물로는 양세봉·양헌수 등이 함께 소개됩니다. 자세한 계보는 남원 양씨 페이지를 참고하세요.

묘소

중국 장쑤성에 묻혔다가 1993년 묘소 발굴 조사를 거쳐 유해가 봉환되어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후손

아들 양효손은 1951년 납북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손녀의 남편은 국가보훈처장을 지낸 박유철이라고 전합니다.

양기탁 자주 묻는 질문

양기탁의 본관은 어디인가요?

남원 양씨로, 병부공파 계통으로 소개됩니다.

양기탁은 어떤 일을 했나요?

베델과 대한매일신보를 만들어 항일 언론을 이끌었고, 신민회와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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