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지낸 파주 염씨 중시조, 곡성부원군, 시호 충경

| 생몰 | 1304 ~ 1382 |
| 시대 | 고려 말 |
| 본관 | 파주 염씨 |
염제신(廉悌臣, 1304~1382)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주이며 파주 염씨의 중시조로 모셔집니다. 처음 이름은 염불노(廉佛奴)였다가 뒤에 제신으로 고쳤다고 하며, 자는 개숙(愷叔), 호는 매헌(梅軒), 시호는 충경(忠敬)입니다. 할아버지는 충렬왕 때 세도를 누린 염승익, 아버지는 염세충이고, 어머니는 가순택주로 불린 평양 조씨(조인규의 딸)라고 전합니다. 생몰일은 위키백과가 1304년 10월 30일~1382년 3월 18일로 적지만, 향년은 문서마다 77세·78세·79세로 엇갈립니다.
어린 시절인 1314년 무렵 원나라로 건너가 고모부 집에서 글을 배웠고, 1324년부터 1340년 무렵까지 원 태정제의 숙위를 맡으며 상의사·정동성낭중·익정사승 등을 지냈다고 합니다. 1343년 고려로 돌아온 뒤에는 삼사우사, 도첨의평리, 찬성사 등을 거쳤고, 1350년에는 성절사로 원나라 대도에 다녀왔습니다. 1354년 좌정승·우정승을 지내며 곡성백에 봉해졌고, 1356년 기철 일파를 숙청하는 공민왕의 개혁 때 서북면도원수와 수문하시중을 맡았습니다. 1358년부터 1361년 사직할 때까지 문하시중으로 있었고, 1363년 우정승에 올랐으나 탄핵으로 파면되었다가 이듬해 영도첨의사사로 복직하여 서북면도통사로 나갔습니다. 1369~1371년에는 올라성(오로산성) 정벌에도 참여했습니다.
1374년 다시 문하시중이 되었으나 명나라 사신 채빈의 일로 광주에 유배되었다가 우왕 즉위 뒤 복직했고, 1375년부터 1380년까지 영삼사사·판문하사·문하부 영사를 지냈습니다. 공민왕은 그를 두고 “염공은 나에게 만리장성”이라 했다고 전해질 만큼 깊이 신임했습니다. 딸이 공민왕의 후비 신비 염씨가 되었고, 세 아들 국보·흥방·정수가 모두 높은 벼슬에 올라 가문의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사후 6년인 1388년 무진피화로 세 아들이 처형되거나 화를 입어 가세가 급격히 꺾였고, 후손들이 그를 가문을 다시 일으킨 ‘기세조’로 받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파주 염씨는 시조 염형명 이후 고려 문벌로 성장했으나, 후손들은 염제신을 ‘기세조(起世祖)’로 모십니다. 위키백과는 가문을 다시 일으켰기에 이렇게 모신다고 적고, 종친회 자료는 그를 중시조로 부릅니다. 어머니 쪽으로는 원 간섭기 권세가였던 평양 조씨 조인규의 외손이었고, 사위 중에는 개국공신 정희계가 전합니다. 본관도 시조가 살던 봉성에서 곡성(1354년 곡성군 책봉 뒤)을 거쳐 서원, 파주로 바뀌었다고 설명되는데, 이는 그의 봉작이 가문 정체성에 남긴 영향을 보여줍니다.
그의 초상은 공민왕이 직접 그려 내려주었다고 이색의 『목은문고』에 전하며, 1991년 9월 30일 보물 제1097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기탁)된다고 소개됩니다. 세로 53.7cm, 가로 42.1cm의 족자를 액자로 다시 꾸민 것이라 하며, 오늘날 전하는 고려시대 인물화가 매우 드문 만큼 귀하게 여겨집니다. 위키미디어 공용에는 그의 친필 서한문 이미지도 올라 있습니다. 작품 귀속(공민왕 작)은 전승에 근거한 설명이므로 ‘전한다’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년 뒤인 1388년 정월, 둘째 아들 염흥방과 셋째 염정수가 임견미·이인임 일파와 함께 숙청되었고, 장남 염국보도 같은 화에 연루되었다고 합니다. 종친회 자료는 이후 후손이 상주·풍덕·보성·나주·임실 등지로 흩어졌다고 설명합니다. 한편 딸 신비 염씨는 공민왕의 후비였습니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일대(위키백과는 대강면 우근리, 종친회·우리문화신문은 강남면 대곡)에 있었다고 하나, 6·25 이후 휴전선 안쪽에 놓여 찾아가기 어렵다고 합니다. 목은 이색이 글을 짓고 한수가 쓴 신도비가 묘소 앞에 있었다고 전합니다. 나주 충경서원과 충남 보령 수현사에 제향됩니다.
보물 제1097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 보관되는 것으로 소개됩니다. 관람 여부는 박물관에 확인하세요.
아닙니다. 시조는 고려 태조 때 사도·삼한벽상공신이 된 염형명이고, 염제신은 중시조(기세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