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회·의열단·신간회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광복 직후 초대 경상북도 부지사·대구부윤, 호는 지오
| 생몰 | 1880 ~ 1949 |
| 시대 | 일제강점기·광복 직후 |
| 본관 | 인천 이씨 |
이경희(李慶熙, 1880~1949)는 대한제국의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정치인입니다. 본관은 인천, 자는 군선(君善) 또는 군미(君美), 호는 지오(池吾)로 '나라 잃은 나는 못난이'라는 뜻입니다.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무태리(현 대구광역시 북구)에서 이병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공도공 이문화의 19대손으로 전합니다. 동생 이강희도 독립운동가였습니다. 1905년 서울 기호중학교를 졸업했고, 을사늑약에 반대했으나 뜻이 꺾이자 교육계로 나아가 대구 협성학교와 안동 협동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1909년 안창호·윤치호 등과 청년학우회를 조직했고, 1910년 신민회에 가입해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자금 마련에 참여했습니다. 105인 사건을 피해 만주로 망명해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을 모았고, 심양에 달신학교를 세워 교포 교육에 힘썼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지린성에서 김원봉 등과 의열단 조직에 참여했으며, 1923년에는 조선총독부 건물 폭파를 목적으로 폭탄과 권총, 신채호의 격문 등을 국내로 들여오는 거사를 준비하다 폭파 직전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1년간 복역했습니다. 이후 신간회 조직에 참여해 경북지회 등을 세웠습니다.
일제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대구 야산에 숨어 농사를 지으며 광복을 기다렸다고 전합니다. 1945년 8월 16일 위촉장을 받아 초대 경상북도 부지사로 대구부윤을 겸해 행정 공백을 막았고, 미군정 민정관을 거쳐 1946년 9월 미군정의 정책에 환멸을 느껴 사임했습니다. 1949년 7월 남선경제신문사 사장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 4일 대구 자택에서 69세로 사망했습니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동구 망우공원에 '애국지사 지오 이경희 공적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일부 활동 서술은 위키백과 기준이므로 국가보훈부 공훈록과 함께 보시기 바랍니다.
대구 협성학교·안동 협동학교에서 가르치다 청년학우회와 신민회에 참여했습니다.
폭탄과 총기를 국내로 들여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려던 계획 중 체포되어 1년간 복역했습니다.
1945년 8월 초대 경북 부지사 겸 대구부윤에 위촉되었다가 1946년 9월 사임했습니다.
대구시 북구 동변동(옛 무태) 가람봉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위키백과).
동생 이강희(1898~1940)도 독립운동가였습니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