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이씨(仁川 李氏) — 고려 현종 때 소성현개국후에 봉해진 이허겸을 시조로 하며, 이자연의 세 딸이 문종의 비가 되면서 고려 최고의 외척 문벌로 성장한 성씨입니다. 경원·인주·소성 이씨로도 불립니다.
고려 현종 때 소성현개국후에 봉해진 이허겸을 시조로 하며, 이자연의 세 딸이 문종의 비가 되면서 고려 최고의 외척 문벌로 성장한 성씨입니다. 경원·인주·소성 이씨로도 불립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인천 이씨 인구는 약 83,855명으로 집계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씨·본관 가운데 하나입니다. 같은 이씨라도 본관(인천)이 다르면 계통이 다른 집안입니다. 본관·파·항렬의 뜻이 궁금하다면 본관·파·항렬 정리 가이드를 참고하세요.
인천 이씨(仁川 李氏)는 인천광역시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입니다. 역사 기록과 문중 자료에서는 경원 이씨(慶源李氏), 인주 이씨(仁州李氏), 소성 이씨 등으로도 불립니다. 인천 지역은 본래 매소홀현이었다가 신라 경덕왕 때 소성(邵城)으로 바뀌었고,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인천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집안을 두고 시대에 따라 소성·인주·경원·인천이라는 이름이 함께 쓰였으며,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83,855명으로 집계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통계청 원자료는 직접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문중에서는 신라 경덕왕 때 아찬 허기(許奇)가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가 안녹산의 난을 만나 피난하는 당 현종을 호종한 공으로 황제의 성인 이(李)씨를 하사받았다고 전합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허기를 가락국 허황후의 23세손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시조는 허기의 후손인 이허겸으로, 허기의 10세손(또는 9대 후손)으로 자료마다 다르게 적혀 있어 정확한 대수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허겸은 고려 현종 때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개국후에 봉해지고 식읍 1,500호를 받았으며, 그의 딸이 안산 김씨 김은부와 혼인해 낳은 세 딸이 1022년 현종의 후비가 되었습니다. 그 아들들이 덕종·정종·문종이 되어 이허겸은 세 왕의 외증조부로 기록됩니다.
이허겸의 손자 이자연은 1024년 장원으로 급제해 문종 때 문하시중에 올랐고, 세 딸이 모두 문종의 비(인예태후·인경현비·인절현비)가 되었습니다. 인예태후가 낳은 순종·선종·숙종으로 왕통이 이어지면서 인천 이씨는 고려 최고의 외척 가문이 되었고, 한국어 위키백과는 이 가문이 10명의 왕비와 18명의 재상을 배출했다고 소개합니다. 가문의 영향력은 정치에만 머물지 않아, 이자연의 아들 소현은 금산사 혜덕왕사, 외손자 의천은 대각국사가 되는 등 불교계에도 뻗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집안 사이에서도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습니다. 선종 이후 이자의는 한산후 왕윤을 추대하려다 1095년 숙종 쪽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 사촌 이자겸은 예종·인종의 장인이자 인종의 외조부로 권력을 휘두르다 1126년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해 영광에 유배되었습니다. 반면 이자현은 벼슬을 버리고 춘천 청평산에서 선을 닦았고, 이공수는 외척이면서도 이자겸의 난 토벌에 참여해 청렴하게 문하시중으로 치사했습니다. 이처럼 한 집안에서 권신과 은거자, 충직한 재상이 함께 나왔다는 점이 인천 이씨 역사의 특징입니다.
무신집권기에는 이인로가 『파한집』을 남겼고, 대몽 항쟁기에는 이장용이 원종의 입조를 관철하며 몽골과의 외교를 이끌었습니다. 조선 초에는 이문화(공도공)가 대제학·대사헌·판서를 지냈다고 전하며, 그의 후손에서 공도공파가 갈라졌습니다. 세종 때에는 이징옥이 김종서와 함께 6진을 개척했으나 1453년 계유정난 직후 거병했다가 피살되어, 그 후손은 한동안 신분을 숨겨야 했다고 전합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이휴복이 의병으로 활동했고, 이후 이괄의 난 평정과 병자호란 대응에서 공을 세웠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경희가 신민회·의열단·신간회에서 활동했고, 광복 직후 초대 경북 부지사와 대구부윤을 지냈습니다. 같은 집안의 이강희 등도 독립운동에 나섰다고 전합니다.
시중공파는 이작신(李作臣)을 파조로 합니다. 이 초안에서는 이작신의 생몰과 관력을 별도 자료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인천 이씨의 대표 분파 네 가지 가운데 하나로 시중공파를 소개합니다. 파 이름의 '시중'은 문하시중이라는 관직명과 관련이 있어 보이나, 파조가 어떤 관직을 지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으니 족보와 대종회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공도공파는 이문화(李文和, 1358~1414)를 파조로 합니다. 이문화는 조선 초에 대제학·대사헌·판서를 지내고 시호를 공도(恭度)라 했다고 전하며, 호는 오천(烏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이휴복을 이문화의 8대손, 이경희를 19대손으로 적고 있어, 임진왜란 이후와 일제강점기의 여러 인물이 이 계통에서 나왔음을 보여 줍니다.
쌍명재파는 『파한집』의 저자 이인로(1152~1220)를 파조로 하며, 파의 이름은 그의 호 쌍명재에서 나왔습니다. 이인로는 이허겸의 손자이자 이자연의 아우인 이자상의 후손으로, 문하시중 이공수의 일족입니다. 이인로의 아들로는 이정·이양·이온·이세황·이아대 등이 전합니다.
충강공파는 이징옥(1399~1453)을 파조로 하며, 파의 이름은 그의 시호 충강(忠剛)에서 나왔습니다. 계유정난 직후 이징옥이 피살되자 셋째 아들 연원이 유모에 의해 살아남아 경주 일대에 숨어 후손을 이었고, 후손은 순조 때 다시 세상에 나왔다고 전합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현재 이 후손이 인천 이씨 충강공파로 이어지고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파(계파) 구분은 문중·족보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우리 집안 파는 족보에서 확인하세요.
이허겸(인천 이씨 시조), 이자연(문종 때 문하시중), 이자의(선종 외척), 이자겸(이자겸의 난), 이자현(청평거사), 이공수(문하시중), 이인로(파한집의 저자), 이장용(대몽 외교의 재상), 이징옥(6진 개척 무신), 이휴복(이괄의 난 공신), 이경희(독립운동가)
이름을 누르면 인물 상세(생몰·약력·묘소·후손)를 볼 수 있습니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정보(공공데이터)를 참고한 인천 이씨 계열 독립유공자입니다. 이름을 누르면 공적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인천 이씨의 분파를 시중공파(이작신)·공도공파(이문화)·쌍명재파(이인로)·충강공파(이징옥)로 소개합니다. 이름 그대로 파조의 관직이나 호, 시호에서 이름을 딴 파가 많고, 이 밖에도 문중에 따라 더 세분되는 파가 있을 수 있으므로 정확한 파계는 족보와 대종회 자료로 확인하셔야 합니다. 분적(갈라져 나간 본관)으로는 양산 이씨·흥양 이씨·영산 이씨가 소개되어 있으며, 이징옥의 후손이 한때 초산·초계 등의 본관을 썼다는 기록과 나중에 양산으로 돌렸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이허겸의 묘역과 사당 원인재(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는 인천 연수동 일대에 있습니다. 원인재는 19세기 초 처음 마련되었다고 하며 연수동 신지마을에서 택지개발로 1994년 묘역 옆으로 옮겨 복원·증축되었습니다. 지방에서는 전남 장흥 용산면의 영석재가 청강 이승(1556~1628)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 이씨 후손들이 세운 건물로 전해지고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6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경희의 고향은 대구 북구 무태(서변동·동변동 일대)이며, 이징옥은 경남 양산 출신, 이휴복 집안은 함안과 연고가 있습니다. 이휴복의 진무공신 교서는 도천재에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문종 비 인예태후·인경현비·인절현비, 순종 후궁 장경궁주, 선종 왕비 사숙태후·정신현비와 후궁 원신궁주, 예종 왕비 경화왕후·문경태후, 인종 왕비 연덕궁주·복창원주 등을 인천 이씨 출신 왕실 인척으로 열거합니다. 이 계보가 곧 인천 이씨가 고려 중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문벌이었다는 근거로 인용됩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기준 인구는 약 8만 4천 명(83,855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종회로 '인천이씨 대종회'가 있습니다. 공식 홈페이지 주소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으니 포털에서 대종회 이름으로 검색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항렬자 역시 파마다 달라 이 글에서는 싣지 않았습니다.
인천 이씨의 이야기는 흔히 이자겸의 난으로 대표되지만, 실제로는 한 집안 안에 다양한 길이 공존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외척으로서 권력의 정점에 섰던 이자연·이자겸 계열이 있는가 하면, 학문과 시문으로 이름을 남긴 이인로, 관직을 버리고 은거한 이자현, 청렴한 재상 이공수, 외교로 나라를 지킨 이장용이 있고, 조선 시대에는 무신 이징옥과 이휴복,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 이경희가 나왔습니다. 고려 문벌의 영광과 몰락, 조선 시대 지방 사족으로의 재편, 근대의 항일운동까지 한국사의 큰 흐름이 이 한 성씨의 계보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입니다. 가계 확인은 반드시 족보로 하시기 바랍니다.
시조 이전의 허기 전승은 야사와 족보에 의존하며, 허기와 이허겸 사이의 대수는 9대와 10대로 자료가 엇갈립니다. 이문화의 구체적 생몰과 관력, 시중공파 파조 이작신의 사적은 이번에 별도 자료로 교차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각 인물의 세부 연표도 위키백과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계열의 요약에 의존하므로, 중요한 사항은 『고려사』·『조선왕조실록』과 문중 족보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인천 이씨 종친회 홈페이지는 한국전자족보도서관 종친회 목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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