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의병과 이괄의 난 평정 공신, 병자호란 때 체찰사로 근왕군을 모은 무신, 봉호 인원부원군

| 생몰 | 1568 ~ 1637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인천 이씨 |
이휴복(李休復, 1568~1637)은 조선 중기의 문신 겸 무신이며 본관은 인천, 자는 사장(士長), 호는 양졸정(養拙亭)입니다. 아버지 이인과 경주 박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조선 초 대제학·대사헌·판서를 지낸 공도공 이문화의 8대손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25세였고, 일본군의 함안 약탈 와중에 부모와 형 부부가 모두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후 의병을 일으켜 경상우도에서 활동했고, 정유재란 때는 곽재우 휘하에서 1597년 화왕산성 전투에 참전한 공으로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훈되었다고 합니다.
1606년 무과 을과에 합격해 청하현감(1607)과 청도군수(1610)를 지냈고, 왜구의 침입이 잦던 1611년 임시로 진주목사에 임명되어 왜구를 막았습니다. 이후 대사간·병조판서 등 문무의 요직을 거쳤으나 1622년 병을 이유로 사직해 낙향했고,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에는 관작이 삭탈되어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습니다. 곧 일어난 이괄의 난을 평정한 뒤 도원수 장만의 천거로 총융청 관성장이 되었고 갈성분위진무공신(竭誠奮威振武功臣)에 녹훈되어 인원군(仁原君)에 봉해졌습니다. 이 공신 교서는 오늘날 도천재에 소장되어 있다고 전합니다.
이후 총융사, 공조·병조의 요직, 강원도·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며 후금에 대한 국경 방비에 힘썼고, 1635년 판중추부사로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 난징에 다녀왔습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상소를 올려 출전을 청해 체찰사가 되었고, 강원도로 내려가 근왕군을 모아 서울로 보내려 했으나 검단산 전투 이후 후퇴했고, 1637년 2월 10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자료에 따라 무열 또는 정무로 엇갈립니다. 한국어 위키백과의 서술에는 정확성이 의심되는 부분이 있으므로 세부 연표는 『조선왕조실록』과 문중 기록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가족을 잃은 뒤 의병을 일으켰고 1597년 화왕산성 전투 공으로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훈되었다고 합니다.
1624년 이괄의 난 평정 후 진무공신에 녹훈되고 인원군에 봉해졌습니다.
체찰사로 강원도 근왕군을 모으려 했으나 검단산 전투 뒤 후퇴했고 1637년 2월 병사했습니다.
묘소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이인, 부인 진주 강씨, 5남 2녀를 두었다고 전합니다(위키백과).
도천재에 소장된 것으로 전하며 국가유산청이 사진을 공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