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와 함께 6진을 개척한 함길도 도절제사, 계유정난 뒤 거병했다 피살된 무신, 호는 원봉, 시호 충강
| 생몰 | 1399 ~ 1453 |
| 시대 | 조선 전기 |
| 본관 | 인천 이씨 |
이징옥(李澄玉, 1399~1453)은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인천이며 호는 원봉(圓峰), 시호는 충강(忠剛)입니다. 경상남도 양산에서 중추원지사 이전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소성백 이허겸의 후손으로, 할아버지 이만영은 고려 말에 벼슬하다 조선 개국 후 보조공신에 추록되었다고 전합니다. 어려서부터 담력이 뛰어나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았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청렴결백하여 청백리로 이름났다고 합니다.
1414년 갑사로 출사해 1416년 무과에 급제했고, 1418년 태종이 주관한 친시 무과에서 장원하여 사복시소윤이 되었습니다. 약관의 나이에 영북진 첨절제사가 되어 '소년 절제사'로 불렸습니다. 세종 때 김종서를 따라 평안도·함경도 변방을 지키며 경원진 첨절제사, 회령부판사, 경흥도호부사, 함길도 도절제사 등을 지냈고 여진족 토벌과 4군 6진 개척에 공을 세웠습니다. 여진족들은 그를 '어금니를 가진 큰 돼지'라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명나라 사신 윤봉의 무리한 공물 요구를 묵살한 일화도 전해집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집권하자 이징옥은 파면되고 박호문이 후임으로 왔습니다. 그는 상경하던 중 정변 소식을 듣고 회군해 박호문을 죽이고 종성에서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칭하며 거병했으나, 종성판관 정종·호군 이행검 등의 습격으로 두 아들과 함께 피살되었습니다(향년 55). 채제공은 이를 단종을 위한 거병이었다고 보았으나 자료마다 평가가 갈립니다. 셋째 아들 연원은 유모 덕분에 목숨을 건져 경주 일대로 숨어들었고, 후손이 인천 이씨 충강공파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1791년(정조 15) 관작이 회복되고 충강의 시호가 내려졌으나 정조 사후 다시 추탈되었으며, 1908년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고 전합니다.
1418년 친시 무과에 장원하고 약관에 영북진 첨절제사가 되어 '소년 절제사'로 불렸습니다.
김종서를 따라 4군 6진 개척과 여진 방어에 공을 세웠습니다.
계유정난 뒤 파면되자 후임 박호문을 죽이고 거병했으나 종성에서 피살되었습니다. 대금황제 칭호는 실록의 기록이며, 단종을 위한 거병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묘소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계룡산 동학사 숙모전과 영월 장릉 단종 배식단에 배향되었다고 합니다.
셋째 아들 연원(淵源)의 후손이 인천 이씨 충강공파로 이어진 것으로 전합니다(후손이 한때 본관을 초산·초계 등으로 칭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인천 이씨 충강공파는 이징옥의 시호에서 이름을 따며, 그의 셋째 아들 연원의 후손으로 이어졌다고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