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업가·언론인 ·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사장 · 한국전쟁 때 납북
| 생몰 | 1884 |
| 시대 | 대한제국·일제강점기·광복 이후 |
| 본관 | 온양 방씨 |
방응모(方應謨)는 일제강점기에 금광 사업으로 큰돈을 벌어 『조선일보』를 인수하고 경영한 언론인입니다. 본관은 온양, 호는 춘해(春海)였다가 뒤에 계초(啓礎)로 바꾸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가 1884년 1월 3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아버지 방계준과 어머니 온양 박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적고, 위키백과는 1883년(1월 3일 또는 9월 29일)으로 적어 출생 연도가 엇갈립니다. 아버지 이름의 한자도 方啓畯(백과사전)과 方桂準(위키백과)으로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1907년 무렵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신학문을 배우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정주에서 대서업과 여관업을 하다가 1922년 『동아일보』 정주지국장이 되었고, 여자교육회와 수해구제회 활동, 조선민립대학기성회 활동에도 참여하며 이승훈·조만식과 교유했습니다. 1924년 평안북도 삭주의 교동광산을 인수했는데, 1926년 금맥이 발견되면서 굴지의 광산업자가 되었고, 1932년 광산을 135만 원에 일본 회사에 팔았습니다. 1928년에는 자신의 호를 딴 춘해장학회를 만들었습니다.
1933년 3월 자금난에 빠진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해 부사장이 되었고, 그해 7월 주식회사로 바꾸면서 사장에 올라 1940년 8월 폐간될 때까지 재임했습니다. 1935년에는 잡지 『조광』을 창간했습니다. 백과사전은 이 시기 그가 고사기관총 구입비 헌납, 중일전쟁 정당화 시국강연, 국민정신총동원·국민총력 조선연맹과 조선임전보국단 간부 활동, 『조광』의 친일 논설 등에 참여했다고 적고 있으며, 이런 행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었습니다.
광복 뒤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1945년 11월 『조선일보』를 복간했습니다.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총무부장,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지냈고, 김구와 가까이 지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서울 자택에 머물다 7월 6일 납북되었고, 그 뒤 생사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위키백과는 그해 9월 북으로 끌려가던 중 공습으로 숨졌다는 증언을 전합니다. 친조카 방재윤을 양자로 들였고, 그 아들 방일영·방우영 형제가 뒤에 『조선일보』를 이끌었습니다.
납북 뒤 생사와 묘소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1999년 손자 방일영이 그의 가묘를 마련했습니다.
양자 방재윤(친조카)의 아들 방일영·방우영이 『조선일보』 회장을 지냈고, 방일영의 아들 방상훈이 뒤를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