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장대현교회 목사, 3·1운동 민족대표 33인, 평양 대부흥운동의 주역, 호는 영계(靈溪)

| 생몰 | 1869 ~ 1935 |
| 시대 | 근현대 |
| 본관 | 해평 길씨 |
길선주(1869~1935)는 평안남도 안주 출신의 장로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해평, 자는 윤열(潤悅), 호는 영계(靈溪)입니다.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관성교(관우를 섬기는 종교)와 선도 수련에 몰두하다가, 1897년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1901년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가 되었고, 1907년 1월 장대현교회 새벽기도회에서 공개 회개를 한 것이 평양 대부흥운동의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됩니다. 같은 해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첫 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10년에는 '백만 명 구령 운동'을 제창했습니다. 새벽기도회를 한국 교회에 정착시킨 인물로도 기억됩니다.
1919년 3·1운동 때 기독교계 대표로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민족대표 중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적지만 다른 자료로는 교차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석방 뒤에도 전국을 다니며 부흥회를 이끌다가 1935년 황해도 재령에서 설교 중 쓰러져 별세했다고 전해집니다. 200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한학을 배우던 길선주는 관성교와 선도 수련을 거쳤으나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했고, 1897년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1901년 장대현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1907년 1월 장대현교회 새벽기도회에서 그가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일이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번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됩니다. 이후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 전통을 정착시킨 인물로 꼽힙니다. 같은 해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에 참여해 체포되었습니다. 같은 평양 출신 인사로는 조만식이 있습니다. 설교집 『말세학』 등을 남겼고 『해타론』 『만사성취』 등의 저서가 전합니다. 2009년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묘소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