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 조선 사림 학맥의 뿌리,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 시호 충절

| 생몰 | 1353 ~ 1419 |
| 시대 | 고려 말~조선 초 |
| 본관 | 해평 길씨 |
길재(1353~1419)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살았던 성리학자로 본관은 해평,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입니다. 해평 길씨는 그를 아버지 길원진과 함께 가문을 일으킨 중시조급 인물로 꼽습니다. 이색·정몽주·권근 등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고 전하는데, 정몽주의 직접 제자였는지에 대해서는 이견도 있습니다.
1374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386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박사·문하주서 등을 지냈습니다. 고려의 기운이 쇠하는 것을 보고 늙은 어머니를 봉양한다는 이유로 사직해 고향 선산으로 돌아갔고, 1392년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1400년 이방원(뒤의 태종)이 태상박사를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사양했다고 전합니다.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쳐 그의 학통은 김숙자를 거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로 이어졌고 조선 사림의 뿌리로 평가됩니다. 1419년 세상을 떠났으며 영조 때 충절(忠節)의 시호를 받았다고 합니다. 문집으로 『야은집』이 전하고, 시조 「회고가」(오백 년 도읍지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어려서 절에서 글을 배우고 개경에서 이색·정몽주·권근을 스승으로 성리학을 익혔다고 전합니다. 1374년 생원시, 1386년 문과에 합격했으며 1388년 성균관 박사가 되어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1389년 문하주서가 되었으나 곧 고려의 앞날을 걱정해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조선 건국 후 이방원이 태상박사를 내리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며 사양했고, 쌀과 콩을 보내자 나라에 한 일이 없다며 받지 않았다는 일화가 소개됩니다(일화는 문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길재의 학통은 김숙자(김숙자)에게 전해져 아들 김종직으로 이어지고 김굉필·정여창(정여창)·조광조에게 닿아 사림파의 뿌리가 되었다고 평가됩니다. 1431년 『삼강행실도』에 충신의 본보기로 올랐다고도 합니다. 세종이 후손의 벼슬길을 열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나 자료마다 설명이 다릅니다.
구미 금오산 아래에는 길재를 기리는 금오서원(경상북도 기념물 제60호)과 채미정(명승 제52호)이 있습니다. 금오서원은 1570년 무렵 유림이 건립을 청해 세워졌고 임진왜란에 불탄 뒤 160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다시 세웠다고 하며, 사액 연도는 자료에 따라 1575년 또는 1669년으로 갈립니다. 채미정은 1768년 선산부사 민백종이 지은 정자로, 이름은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땄다고 전합니다.
경북 구미시 오태동(금오산 아래)에 묘소가 있다고 전합니다. 묘 앞 묘비는 1725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는 보도가 있으나 확정된 사실은 아닙니다.
아들로 길사문·길사순이 전하며 딸들은 김씨·이씨·한씨 집안에 출가했다고 합니다. 후손 가운데 일부는 충남 금산 부리면·남이면 일대에 정착했다고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