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와 함께 개혁을 이끈 기묘사화의 사림, 호는 사서·동천, 시호 문의
| 생몰 | 1482 ~ 1520 |
| 시대 | 조선 전기 |
| 본관 | 청풍 김씨 |
김식(金湜, 1482~1520)은 중종 때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본관은 청풍(淸風)입니다. 자는 노천(老泉), 호는 사서(沙西)·동천(東泉)·정우당(淨友堂), 시호는 문의(文毅)입니다. 아버지는 생원으로 예빈시정에 추증된 김숙필이고, 어머니는 사천 목씨 목철성의 딸입니다. 효령대군의 후손인 영신군 이이의 딸 전주 이씨와 혼인해 김덕수·김덕순·김덕기·김덕무 네 아들을 두었다고 전합니다.
1501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성리학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중종 초 성균관과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광흥창주부에 처음 나아가, 형조·호조좌랑과 사헌부 지평·장령을 지냈습니다. 1519년 현량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했는데, 일곱 평가 항목에서 모두 만점을 받은 유일한 급제자였다고 전해집니다. 급제 뒤 성균관 사성, 홍문관 직제학·부제학을 거쳐 대사성에 올랐습니다.
조광조 등과 함께 위훈 삭제, 미신 타파, 향약 실시 같은 개혁을 밀고 나갔으나, 1519년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 절도안치 처분을 받았습니다. 영의정 정광필의 비호로 경상도 선산 유배로 바뀌었고, 이후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절도로 옮겨진다는 소식을 듣고 거창으로 피신했습니다. 1520년 5월 16일 거창에서 시를 짓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죽기 전 중종에게 올릴 상소문을 남겼다고 합니다.
1519년 현량과는 천거로 인재를 뽑는 제도였습니다. 김식은 이 시험에서 장원을 했다고 전하며, 급제 직후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습니다. 조광조의 개혁에 함께해 위훈 삭제와 향약 실시 등을 추진했습니다.
묘소는 남양주 삼패동의 문의공파 묘역에 있으며, 이곳에는 김식 외에 김육·김좌명 등의 묘도 함께 있습니다. 명종 때 복권되었고 선조 때 이조참판에 추증된 뒤 좌찬성,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고 합니다. 양근 미원서원, 청풍 황강서원, 거창 완계서원 등에 제향되었습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일대의 청풍 김씨 문의공파 묘역에 있습니다. 1520년 6월 양주군 금촌리에 묻혔다고 전합니다.
후손으로 김육·김좌명·김우명·김석주 등이 알려져 있으며, 현종비 명성왕후와 정조비 효의왕후의 직계 조상이 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