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문과에 급제해 조선 태종 때까지 활동한 문신·서예가, 어촌호의 시조, 호는 어촌·수선
| 생몰 | 1416 |
| 시대 | 고려 말·조선 초 |
| 본관 | 곡부 공씨 |
공부(孔俯, ?~1416)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활동한 문신으로, 자는 백공(伯恭), 호는 수선(修仙)·어촌(漁村)입니다. 창원 공씨의 시조 공소의 손자이자 공여의 큰아들이며, 동생은 고산 공은입니다.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전하며, 전의부령과 예조총랑을 거쳐 집현전태학사에 올랐습니다. 젊어서 정몽주·이색과 교유했다고 합니다.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벼슬을 이어 문서응봉사, 별감제조, 우군동지총제, 검교한성윤 등을 지냈습니다. 서장관으로 중국에 여섯 번 다녀왔을 만큼 외교 실무를 맡았고, 소격전제조를 겸하며 중국에서 도교 의식을 배워 왔다고 합니다. 도교를 좋아한 태종의 총애를 받아, 1413년에는 태종이 장생불로의 수련법을 그에게 묻기도 했습니다. 기우제를 주관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의 너그럽고 솔직한 성품을 높이 평가하여 ‘팔청(八淸)의 우두머리’라 불렀다고 합니다.
글씨에도 뛰어나 초서와 예서에 능했습니다. 양주 회암사의 묘엄존자 무학선사탑비와 한산의 한산군 이색 신도비는 그의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1416년(태종 16) 천추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객사했습니다. 후손은 그를 파조로 하는 어촌호로 이어지며, 그 아래 생원공파·회안군파·주부공파·감찰공파·장성파가 갈라졌습니다. 본관은 위키백과가 창원으로 적으며 대백과사전 본문에는 따로 적혀 있지 않습니다. 일부 문서는 그를 고려 말 인물로, 일부는 조선 전기 인물로 분류하는데, 이는 두 왕조에 걸쳐 활동한 그의 이력 때문입니다.
공부는 정치가이면서 도교 의식과 글씨에 두루 밝았던 점이 특징입니다. 서장관으로 여섯 번 중국을 오간 경험은 당시 대명 외교의 실무를 맡은 인물임을 보여 줍니다. 그를 어촌호의 시조로 모시는 것은 후손들이 그의 호 ‘어촌’을 갈래 이름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공부는 1376년 문과에 급제해 전의부령과 예조총랑을 지냈고 집현전태학사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 이색·정몽주와 교유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생 공은은 척불소를 올려 유배된 일로 알려져, 형제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조선 건국 후 문서응봉사·별감제조·우군동지총제·검교한성윤 등을 맡았고, 서장관으로 중국을 여섯 차례 오갔습니다. 도교에 밝아 소격전제조를 겸하며 태종의 신임을 얻었다고 합니다.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고, 회암사 무학선사탑비와 한산군 이색 신도비의 글씨가 그의 것으로 전합니다.
1416년 천추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조 공소의 손자로서 어촌호의 시조로 모셔집니다.
객사하여 돌아오지 못했다고 전하며, 묘소의 위치는 이 초안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공부를 파조로 하는 어촌호 아래 생원공파·회안군파·주부공파·감찰공파·장성파가 갈립니다.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해 조선 태종 때까지 활동한 문신·서예가로 호는 어촌이며 어촌호의 시조입니다.
1416년 천추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객사했다고 전합니다.
양주 회암사 묘엄존자 무학선사탑비와 한산군 이색 신도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