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척불소를 올렸다 유배되고 조선 건국 뒤에도 절개를 지킨 문신, 호는 고산, 고산호의 시조
| 시대 | 고려 말 |
| 본관 | 곡부 공씨 |
공은(孔㒚)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백량(伯良), 호는 고산(孤山)입니다. 창원 공씨 시조 공소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공여, 어머니는 경주 최씨 최수의 딸이고, 부인은 함양 박씨입니다. 형 공부는 공양왕 때 예조총랑을 지내고 조선 건국 후 대명 외교 사신으로 활약했습니다. 족보와 기우만이 지은 묘비문에는 1380년(우왕 6) 과거에 합격해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고 적혀 있으나, 대백과사전은 합격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고 고려 말에 그런 속도로 재상급에 오르기는 어려워 사실성이 의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전합니다. 고려 말에 척불소, 곧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예안 의금도로 유배되었고, 이색이 유배 가는 그에게 시 두 편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척불소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습니다. 조선이 건국된 뒤에는 조정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다시 유배되었습니다.
순천 낙포로 옮겨진 그는 스스로 ‘고산’이라 칭하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고산선생실기』에는 유배지에서 지은 「순천적소시」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후세에 경현사와 두문서원에 배향되어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킨 선비로 기려집니다. 아들로 공신굉과 공신주가 있었고 공신굉은 신호위대장군을 지냈다고 하며, 그의 후손은 고산호로 이어져 제학공파·효절공파·참판공파·충민공파 등으로 갈라집니다. 본관은 대백과사전이 창원으로 적고,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공은의 이야기는 고려 말 성리학자들이 불교를 비판하고 왕조 교체기에 진퇴를 가렸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읽힙니다. 다만 그가 올렸다는 척불소의 내용과 급제 시기는 자료로 확정되지 않아, 이 사이트는 전하는 사실과 의문점을 함께 적습니다.
할아버지는 공소, 아버지는 공여, 형은 공부입니다. 아들 공신굉·공신주가 전합니다.
족보와 묘비문은 1380년 급제와 문하시랑평장사를 말하지만, 대백과사전은 합격자 명단에서 이름이 확인되지 않아 사실성이 의문이라고 합니다. 이 사이트는 두 설을 함께 적습니다.
고려 말에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예안 의금도로 유배되었고, 스승 이색이 시 두 편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부름에 응하지 않아 다시 유배되었고, 순천 낙포에서 ‘고산’이라 칭하며 지냈습니다. 경현사와 두문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유배지였던 순천 낙포에서 생을 마쳤다고 전하며, 묘소 위치는 이 초안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아들 공신굉·공신주가 전하며, 후손은 고산호 아래 제학공파·효절공파·참판공파·충민공파로 갈립니다.
고려 말 척불소를 올려 유배되었고 조선 건국 뒤에도 출사하지 않은 문신으로, 호는 고산이며 고산호의 시조입니다.
공여의 둘째 아들로 어촌 공부의 동생입니다.
경현사와 두문서원에 배향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