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한림학사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해 창원 공씨(오늘날 곡부 공씨)의 시조가 된 인물
| 시대 | 고려 후기 |
| 본관 | 곡부 공씨 |
공소(孔紹)는 고려 후기에 원나라에서 건너와 귀화한 인물로, 오늘날 곡부 공씨의 중시조(옛 창원 공씨의 시조)로 모셔집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를 공자의 후손이며 공완(孔浣)의 아들로 적고, 위키백과 등은 공자의 53세손 공완의 둘째 아들, 곧 공자의 54세손으로 정리합니다. 초명은 소(昭)였으나 고려 광종의 이름과 같아 피휘하여 소(紹)로 고쳤다고 전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원나라 순제 때 한림학사에 임명되었고, 1351년(충정왕 3) 공민왕이 고려로 돌아와 왕위에 오를 때 노국대장공주를 모시고 함께 들어왔습니다. 이후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고 창원백(회원군이라고도 함)에 봉해졌으며, 창원을 본관으로 받았습니다. 그는 원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고려에 남아 한국 공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일부 가계도는 그의 생몰을 1304~1381년으로 적지만, 대백과사전은 생몰년을 미상으로 두고 있어 이 사이트에서는 연도를 확정하지 않습니다.
후손들은 고려와 조선 시대 내내 창원 공씨로 세계를 이어 오다가 1794년(정조 18) 공자의 고향인 곡부로 본관을 고쳤습니다. 한국 쪽 세표는 그를 공자의 54세손으로 정리하지만, 『동국궐리지』 등 일부 기록은 후손의 세대를 다르게 헤아려 세수 표기가 자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목은집』의 「백공설」에는 공소 이전에도 공씨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견해가 보인다고 대백과사전은 덧붙입니다. 그의 아들 공여(孔帤)는 집현전태학사 등을 지냈고, 손자 공부와 공은이 각각 어촌호와 고산호의 시조가 됩니다. 묘소는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예곡동에 있다고 하며, 해마다 음력 10월 1일에 향사를 올린다고 전합니다.
공소는 원나라 순제 때 한림학사에 임명되었다고 전합니다. 1351년 공민왕이 원에서 고려로 돌아와 즉위할 때 왕비 노국대장공주를 모시는 일행에 속해 고려 땅을 밟았습니다. 이 시기 고려와 원은 왕실 혼인으로 얽혀 있었고, 공주를 따라 들어온 사람들이 고려 조정에 자리 잡는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고려에서 그는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고 창원백(회원군이라고도 함)에 봉해졌습니다. 창원을 본관으로 받았다는 뜻의 사적(賜籍)이 창원 공씨의 출발점입니다. 그는 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려에 남아 한국 공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대백과사전은 적습니다.
초명은 소(昭)였으나 광종의 이름을 피해 소(紹)로 고쳤다고 합니다. 공자의 몇 세손인가도 자료에 따라 다릅니다. 위키백과 등은 공완의 둘째 아들, 곧 54세손으로 적고, 한국 쪽 세표도 54세로 정리한다고 하며, 대백과사전은 공완의 아들이라고만 적습니다. 『목은집』 「백공설」에는 그 이전에도 공씨가 들어왔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아들 공여 아래로 공부와 공은 두 갈래가 갈라지고, 이는 오늘날 어촌호와 고산호가 됩니다. 후손들은 1794년 정조의 뜻에 따라 본관을 곡부로 고쳤습니다. 자세한 갈래는 공부와 공은 항목에서 이어집니다.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예곡동에 있다고 전하며, 해마다 음력 10월 1일에 향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아들 공여, 손자 공부(어촌호)·공은(고산호)으로 이어지며 오늘날 곡부 공씨 고려파의 뿌리가 됩니다.
원나라 한림학사로서 1351년 노국대장공주를 모시고 고려에 들어와 귀화한 인물로, 창원 공씨(오늘날 곡부 공씨)의 시조로 모셔집니다.
위키백과 등은 54세손으로 정리하지만 자료에 따라 표기가 조금 다릅니다.
1794년(정조 18) 공자의 고향인 곡부로 본관을 고쳤다고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