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아들을 문과에 올려 오복문을 이룬 예천 권씨, 자 길보
| 생몰 | 1427 ~ 1509 |
| 시대 | 조선 전기 |
| 본관 | 예천 권씨 |
권선(權善, 1427~1509)은 조선 전기 예천의 선비로 본관은 예천, 자는 길보(吉甫)입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용문면 하금곡리 출신이며, 권유손(權幼孫)의 아들이고 대제학 이계전(이계전)의 사위입니다. 1453년(단종 1) 진사시에 합격한 뒤 사포서 별제를 지냈습니다. 큰 벼슬을 한 인물은 아니지만 다섯 아들을 모두 벼슬길에 올려, 예천 권씨가 '오복문(五福門)'이라 불리게 된 중심에 있습니다.
다섯 아들은 권오행·권오기·권오복·권오륜(자료에 따라 오윤)·권오상입니다. 이들 형제가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해 모두 대과나 소과에 오르고 중앙에서 활약했다고 한 지역 기사는 전하며, 그래서 집안을 오복문이라 불렀습니다. 막내 권오상의 손자가 훗날 『대동운부군옥』을 쓴 권문해입니다. 권선이 이계전의 사위였고 아들 권오복의 어머니도 한산 이씨 이계전의 딸이라는 점은 한산 이씨 집안과의 혼맥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 셋째 아들 권오복이 김일손과 함께 사형을 당하면서 집안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권선 자신도 광양으로 귀양을 갔고, 다른 자료에는 아들 권오기가 해남으로 귀양 갔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1506년 중종반정 때 사면되어 고향 하금곡리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권선은 1509년에 세상을 떠났고, 무덤은 예천읍 생천리 제동(堤洞)에 있다고 위키백과는 전합니다. 한 문화 해설은 무오사화 이후 예천 권씨가 한동안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고, '재산은 백 석을 넘기지 말고 벼슬은 진사를 넘기지 말라'는 가훈이 전해진다고 소개합니다. 이 가훈이 권선 본인의 말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오복문 이후 집안의 분위기를 보여 주는 이야기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오복(五福)이라는 이름은 아들 권오복의 이름과도 겹치지만, 위키백과는 다섯 형제가 모두 벼슬에 올라 예천 권씨를 오복문이라 불렀다고 설명합니다. 다섯 형제의 이름이 오행·오기·오복·오륜·오상으로 모두 '오(五)' 자 돌림이라는 점도 눈에 띕니다. 다섯 번째 이름은 자료에 따라 오륜 또는 오윤으로 달라 이번 조사에서는 병기했습니다.
1498년 무오사화로 아들 권오복이 처형되고 권선은 광양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는 8년 뒤인 1506년 중종반정 때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위키백과는 적습니다. 이 사건 이후 예천 권씨의 많은 자손이 안동 권씨로 편입되었다는 설명이 전합니다.
예천읍 생천리 제동(堤洞)에 있다고 위키백과는 전합니다.
아들 권오행·권오기·권오복·권오륜(오윤)·권오상 다섯 형제를 두었습니다. 막내 권오상의 손자가 권문해입니다.
권선의 다섯 아들이 모두 벼슬에 올라 예천 권씨를 부르던 별칭입니다.
대제학 이계전입니다.
예천읍 생천리 제동에 있다고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