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 목사, 제3대 부통령. 자 자경, 호 송암

| 생몰 | 1873 ~ 1964 |
| 시대 | 대한제국~대한민국 |
| 본관 | 강릉 함씨 |
함태영(咸台永, 1873~1964)은 법관, 목사, 정치인이며 본관은 강릉입니다. 함경북도 무산에서 태어났고 자는 자경(子卿), 호는 송암(松岩)입니다. 출생일은 1872년 10월 22일과 1873년 12월 11일로 자료에 둘 다 보이고, 사망 나이도 92세와 93세로 갈려 이 글에서는 1873년생으로 적었습니다. 아버지 함우택은 무관 출신으로 서당 훈장을 지내다 뒤에 중추원 의관이 되었고, 기독교를 받아들여 자녀들이 그 신앙을 이었습니다.
1895년 법관양성소에 입학해 판사·검사의 길에 들어섰고,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를 거쳐 평리원 검사, 법부 참서관, 대심원 판사를 지냈습니다. 독립협회 사건 등을 다루면서 관대한 판결을 내려 이승만·이상재·윤치호 등과 인연을 맺었다고 전해집니다. 1910년 국권이 넘어가자 관직에서 물러났고, 1912년 일제가 경성복심법원 판사로 임명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919년에는 3·1 운동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징역 3년이 확정되었고, 1921년 가출옥했습니다. 이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공부해 1922년 목사 안수를 받았고, 청주·마산·서울 연동교회에서 목회하며 1923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지냈습니다. 1940년 조선신학교 설립에 관여했고, 해방 뒤에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 제2대 심계원장,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 학장을 지냈습니다. 1952년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1956년까지 재임했습니다. 1964년 서울 자택에서 별세했고, 묘소는 2004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옮겨졌습니다.
법관양성소를 마치고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명된 것이 1896년입니다. 독립협회 관련 사건을 다루며 관대한 판결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1905년 법부 법률기초위원 등을 거쳐 1908년 대심원 판사가 되었다가 1910년 사직했습니다. 1919년 2월 민족대표 모임과 독립선언서 인쇄·배포에 참여했고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습니다.
1922년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청주읍교회, 마산 문창교회를 거쳐 1929년 서울 연동교회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1940년 조선신학교 설립과 이사장직을 맡았고, 1950~51년 한국신학대학 학장으로 일했습니다. 1937~1940년에는 신사참배·창씨개명 요구를 거부해 요시찰 인물로 감시받았다고 위키백과는 전합니다.
1952년 8월 제3대 부통령에 취임해 1956년 8월까지 재임했습니다. 1948년 반민특위 특별재판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국회 표결에서 김병로에게 밀렸습니다. 자유당 시기 이승만 환국 추진 활동도 위키백과에 기록되어 있어, 평가는 독립운동·종교 활동과 정치 활동에 따라 다양합니다.
1964년 별세 뒤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에 안장되었다가, 2004년 11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3-116)으로 이장되었다고 전합니다.
14남매를 두었다고 알려졌고, 막내아들 함병춘은 주미대사와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으며 1983년 아웅산 폭탄 테러로 순직했습니다. 손자 함인섭은 강원대학교의 전신 춘천농과대학 학장을 지냈고, 함재봉·함재학은 함병춘의 아들로 학자입니다.
강릉입니다. 위키백과는 본관을 강릉으로 적고, 막내아들 함병춘 항목도 강릉 함씨로 표기합니다.
3·1 운동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이며,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