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가·종교인·민주화운동가, 《씨알의 소리》 발행인, 호 신천·씨알. 2002년 독립유공자(건국포장)
| 생몰 | 1901 ~ 1989 |
| 시대 | 일제강점기~대한민국 |
| 본관 | 강릉 함씨 |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은 사상가이자 종교인, 민주화운동가이며 본관은 강릉입니다.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아버지 함형택과 어머니 김형도 사이에서 태어났고 호는 신천(信天), 씨알, 바보새입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뒤 반성문 제출을 거부해 학교에서 쫓겨났고, 1921년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해 류영모를 스승으로 만났습니다. 1923년 오산학교를 마치고 1924년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가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집회에 참여했으며, 1928년 졸업했습니다.
귀국 후 1938년까지 오산학교에서 역사와 수신을 가르쳤고, 1927년 창간된 동인지 《성서조선》의 필자로 활동하며 1934~35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했습니다. 1940년 계우회 사건으로 약 1년 구금되었고, 1942년 《성서조선》 폐간 사건(성서조선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해방 후 1947년 신의주 학생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투옥되었다가 풀려나 월남했습니다.
1956년부터 장준하의 《사상계》에서 논객으로 활동했고, 1961년 5·16 군사정변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1970년 월간 《씨알의 소리》를 창간해 비폭력·민주·평화의 씨알 사상을 폈고,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관련으로 불구속 기소되었으며, 1979년과 1985년 미국 퀘이커 단체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습니다. 1987년 제1회 인촌상을 받았습니다. 대표 저서에 『뜻으로 본 한국역사』(1967) 등이 있고, 1989년 2월 4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87세로 별세했습니다. 처음 경기도 연천에 모셨던 묘소는 2002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뒤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옮겨졌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무교회주의 신앙에 영향을 받아 김교신 등과 활동했고, 1927년 《성서조선》 창간에 참여했습니다. 1940년 계우회 사건과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구금·수감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습니다(수형번호 1588번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씨알은 그의 호이자 사상의 핵심 개념으로, 비폭력·민주·평화를 이념으로 합니다. 《씨알의 소리》는 1970년 창간되어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폐간되었다가 1988년 12월 복간되었습니다. 1962년 방미 중 퀘이커 인사들과 교류했고, 1961년과 1967년의 퀘이커 모임을 계기로 퀘이커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48), 『인간혁명』(1961), 『역사와 민족』(1964), 『뜻으로 본 한국역사』(1967), 『통일의 길』(1984) 등이 있고, 간디 자서전과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를 번역했습니다.
처음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에 모셨다가 2002년 독립유공자 선정 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3-329)으로 이장되었다고 합니다.
1917년 황득순과 혼인해 7남매를 두었다고 합니다. 자녀 이름은 위키백과에 나오지만 사생활이므로 이 글에서는 생략합니다.
2002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건국포장을 받았고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졌습니다.
씨앗의 알맹이를 뜻하는 말로, 함석헌은 이를 보통 사람들을 가리키는 사상 용어로 썼습니다. 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