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적 許積

세 차례 영의정을 지낸 남인(탁남)의 영수, 호는 묵재·휴옹, 시호 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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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1610 ~ 1680
시대조선 후기
본관양천 허씨

생애 약력

허적(1610~1680)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양천, 자는 여차, 호는 묵재·휴옹입니다. 충청도 중원군 엄정면 괴동리(지금의 충주)에서 태어났다고 전합니다. 부친은 예천군수와 이천부사를 지낸 허한, 모친은 안동 김씨이며, 조부 허잠은 지중추부사를 지냈습니다. 서자로 허견과 허후가 있었고, 허목과는 12촌 종형제, 송준길과는 사돈으로 소개됩니다.

1637년 정시 문과에 급제한 뒤 예문관 검열·홍문관 수찬·사헌부 지평 등을 거쳤고, 1640년 평안도 도사, 1641년 의주부윤을 지냈습니다. 경상도·전라도·평안도 관찰사와 대사헌, 호조판서, 형조판서를 두루 거쳐 1664년 우의정에 올랐고, 영의정을 1664년·1671년·1674년의 세 차례 지냈습니다. 1674년 현종이 승하하자 원상으로 정무를 맡았습니다.

1659년 첫 예송에서는 효종의 상에 3년복을 주장했으나 기년설이 채택되어 패했고, 1674년 두 번째 예송에서는 맏며느리의 예에 따른 1년복을 주장해 받아들여지면서 남인이 집권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남인 가운데서도 온건한 탁남의 영수로 평가되며, 서인 송시열의 사형 문제에는 반대하는 온건론을 폈다고 합니다. 1678년에는 재정 고갈을 막으려 상평통보의 주조·유통을 추진했습니다.

1680년 3월 조부 허잠에게 충정공 시호가 내려진 것을 기념한 잔치에서 비가 오자 숙종이 기름천막을 내리라고 명했는데, 허적이 허락 없이 먼저 가져간 일이 드러나 숙종이 크게 노했다는 '유악 사건'이 몰락의 계기로 전해집니다. 이어 서자 허견의 옥사가 일어나 김석주·김익훈 등이 허견이 복창군 등을 추대하려 했다고 고변했고, 허적은 1680년 경신환국으로 사사되었습니다. 사망일은 5월 11일 또는 6월 7일로 자료마다 다릅니다. 이후 1689년 기사환국으로 복권되었다가 1694년 다시 추탈되고, 1697년 복권, 1701년 다시 추탈되는 곡절을 겪었으며, 정조 때 최종 복관되었습니다(1795년 전후).

예송과 남인

첫 예송에서는 3년설로 패했고, 1674년 두 번째 예송에서는 1년설이 채택되었습니다. 같은 집안의 허목과 함께 남인을 이끌었으나 노선은 온건했다고 평가됩니다.

충주 오량리

19세손 허초가 기묘사화를 피해 충주 엄정면에 숨어 산 데서 후손이 비롯되었고, 허잠이 소태면 오량리로 옮기면서 세거하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이곳에 허한 부조묘·허적 부조묘·허한과 허적과 허잠의 묘가 있습니다.

기록의 엇갈림

위키백과에서도 사망일(5월 11일/6월 7일)·궤장 하사(1678년/1679년)·신원 시기(정조 19년/20년)가 문서 안에서 서로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이 글은 가능한 범위에서 병기했습니다.

묘소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에 묘소가 있고, 오량리에 아버지 허한과 함께 모신 별묘(부조묘)가 있다고 전합니다. 「허한·허적 초상」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 번호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허적 자주 묻는 질문

허적은 누구인가요?

세 차례 영의정을 지낸 남인(탁남)의 영수로 상평통보 주조를 추진했으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사사되었습니다.

허목과는 어떤 관계인가요?

12촌 종형제로 소개됩니다.

복권은 언제 되었나요?

1689년 이후 여러 번 복권과 추탈을 거쳐 정조 때 최종 복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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